애초에 내 시도는 맨 땅에 헤딩이었다. 일본에서처럼 호주에서도 일이 술술 풀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럴 리가.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해외에서의 경험치는 자기가 준비해 온 만큼 가져간다. 털레털레 가벼운 머리로 겁도 없이 *오지잡에 뛰어든 것이 불행의 시작이었다.
주로 일본인을 상대하던 기념품 가게 일을 그만두고 섬으로 들어갔다. 그린아일랜드라 불리는 그곳은 섬 전체가 거대한 리조트였다. 면접을 진행하는 슈퍼바이저의 영어는 반도 채 못 알아들었다. 그저 웃으며 호응했을 뿐인데 덜컥 합격해 버렸다. 그는 웨이트리스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퇴사했는데 나를 뽑는 게 마지막 업무였단다. '아아. 그래서 그렇게 대충 뽑았구나.'하고 스스로 납득했다.
문제는 새로운 슈퍼바이저가 들어오면서 시작됐다. 금발에 푸른 눈, 큰 키를 가진 독일인 남성은 무척 엄격했다. 언어가 서툰 내가 그의 기준을 맞추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4.5성급 리조트의 고급 레스토랑은 대부분 만석이었다. 메뉴는 다양했으며 그릇은 무거웠다. 아침 뷔페 준비는 그럭저럭 해냈지만, 저녁 코스 요리가 문제였다. 단순히 주문을 받고 음식을 나르는 게 아니었다. 식사 속도에 맞춰 다음 요리를 호출하고 커트러리를 바꾸고 손님이 불편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신경 써야 했다.
처음으로 세 개의 테이블을 배정받은 날이 기억난다. 긴장한 몸이 다비드의 석고상처럼 굳었다. 정신없이 바빴지만 스스로는 잘 해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슈퍼바이저 생각은 달랐나 보다. 다음 코스 요리를 호출하려고 터치 스크린 앞에 서 있을 때였다. 같이 일하던 동료가 다가와 테이블은 자기가 맡을 테니 키친으로 가서 음식을 서빙해 달라고 했다.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자 뒤쪽에서 냉정한 얼굴로 고개를 젓는 파란 눈동자가 보였다.
그날 이후, 슈퍼바이저가 떠날 때까지 키친에서 나올 수 없었다. 동료들을 모아놓고 훈계를 늘어놓을 때는 특히 나를 지목해서 혼을 내곤 했는데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 비참함이란 뭐라고 할까. 서바이벌 연애 프로그램에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아 홀로 남겨진 출연자가 된 기분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쏠릴 때마다 자존감이 한 움큼씩 뽑혀나갔다. 조금만 더 준비하고 왔더라면 어땠을까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비루한 자신의 모습에 스스로를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린아일랜드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수천 년 전에 만들어진 산호섬은 잃어버린 거인의 고향처럼 녹음이 우거졌다. 푸른 바다는 유리조각처럼 빛나고 무지개색 열대어가 모래처럼 흩어져 헤엄쳤다. 바깥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고 모두가 행복의 미소를 지을수록 나는 방 안에 틀어박혔다. 누구와도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겉으로는 괜찮은 척 웃었지만 속으로는 노란색 진물이 났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속으로 비웃을까 신경 쓰여 밥도 혼자 먹었다. 절망은 언덕 아래로 굴러가는 눈덩이처럼 점점 불어났다. 자신의 부족함이 만천하에 공개된 것 같아 숨이 막힐 듯 괴로웠다.
상황이 나아진 건 슈퍼바이저가 그만두고 나서다. 엄밀히 말하면 그는 리조트에서 해고되었다. 모두가 합심해서 회사에 컴플레인을 넣은 결과였다. 그의 까다로움이 모두에게 평등했다는 게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시간이 지나 연차가 쌓이자 일은 점차 수월해졌다. 레스토랑 서버 역할도 무난히 수행할 수 있었다. 리조트를 찾는 손님들은 모두가 친절하고 행복해 보였다. 더 이상 아무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의 과오를 감추고 싶어서 열심히 일에 매달렸다.
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어느새 떠날 시간이 다가왔다. 귀국 전에 호주 여행을 계획했기 때문에 남편은 배를 내려 이곳을 방문했다. 룸서비스로 문 앞까지만 가봤던 스위트룸과 저녁식사를 예약했다. 손님이 되어 식사 자리에 앉으니 기분이 묘했다. 오퍼레이션 매니저는 그동안의 수고를 높이 평가하며 샴페인을 서비스로 내주었다. 사원 칭찬에 내 이름이 자주 언급되었다며 고마움을 전하는 그녀의 청록색 눈동자는 진심을 담고 있었다.
마음이 아릿했다. 왜일까. 뿌듯함과 동시에 암울했던 시기가 생각나 오히려 기분이 처량해졌다. 그녀의 진심 어린 칭찬도 나에게는 그저 반쪽짜리였다. 간질간질한 속내를 손톱으로 긁어내고 싶었다. 순탄치 않았던 과정을 파내고 좋은 기억으로만 추억을 메우고 싶었다. 불가능하다는 걸 안다. 그래서 더 불행했고 맘 속 깊이 서글펐다.
남편은 물론 누구에게도 호주에서 있었던 일을 털어놓지 못했다. 위로의 말은 수치심을 더할 뿐이다. 편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 어려운 일은 요리조리 피해 온 약은 인생이었다.정면으로 부딪쳐 온 실패는 마음의 3분의 1 가량을 날려버렸다. 자신의 부족함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 추억 전체를 봉해버렸다. 날카로운 자존심은 영혼 깊숙이 상처를 남겼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거칠게 자리 잡은 흉터를 가리려 점점 소극적인 사람이 됐다. 바깥으로 나가는 게 귀찮아지고 지인과의 연락도 뜸해졌다.
그렇게 소극적인 날들이 이어지던 중, 얼떨결에 엄마가 됐다. 새롭게 찾아온 생명이 신기해서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매 순간이 끝없는 도전의 연속이었다. 움츠러들었던 마음이 매화처럼 기지개를 켰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아이를 키워보자고 마음먹었다.
이유식을 만들고 촉감놀이를 하고 문화센터에 다녔다. 산으로 바다로 나가서 오감을 자극하고 도서관에서 목이 쉬도록 책을 읽어줬다. 그렇게 십 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자 아이는 스스로 먹고 스스로 자고 스스로 놀 수 있게 되었다. 점차 자기주장이 강해지는 아이의성장 속도에 놀랐다. 앞으로 나아가려는 아이를 볼 때면 내가 오히려 방해물이 되고 있지 않나 생각했다. 부모는 임시휴게소 같은 곳이다. 아이가 목적지를 향해 달려갈 때 잠깐 들러 쉴 수 있는 공간이 되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이 손을 놓고 나면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무엇을 대신 붙잡아야 하나. 뒤를 돌아보니 남은 게 하나 없었다. 엄마의 삶이흐릿해지자 불안이 몰려왔다. 이대로 쓸모없는 사람이 될까 봐 초조했다. 초록색 섬 안에 있던 작은 방이 떠올랐다. 매일아침 자신의 초라함을 직면해야 했던 그곳으로 돌아가게 되는 건 아닐까 두려웠다.
이대로 있을 순 없었다.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경단녀의 삶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