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에서 만난 첫 번째 집주인은 변태였다. 머리가 하얗게 세고 덩치가 큰 호주인이었다. 언제나 헐렁한 반팔에 반바지 차림으로 느닷없이 거실에 출몰하곤 했다. 룸메이트는 모두 일본인 여성으로 다들 유학생이었다. 방값이 다른 곳보다 저렴해서 별다른 고민 없이 주거를 결정했다. 처음에는 은퇴한 할아버지가 학생들을 돕기 위해 방을 싸게 내놓은 줄 알았다. 세상 순진했다.
집은 꽤 근사했다. 드라마에서 보던 서양식 주택이었다. 넉넉한 이층 건물에 근사한 수영장이 딸려 있었다. 그런데 아무도 수영을 하지 않았다. 다들 오래 살아서 흥미를 잃은 건가 싶었다. 나라도 즐겨야지 싶어 물에 들어가면 가끔 집주인이 따라 들어와 자리를 잡곤 했다. 수북한 가슴털이 금빛으로 빛나며 물살에 너울거렸다. 친구와 책방에서 19금 책을 발견한 것 마냥 부끄럽고 신기해서 속으로 호들갑을 떨었다. 저기에 털이 나는 이유가 뭘까. 턱받이 대용으로 쓸 수 있겠는데. 빤히 쳐다보게 될까 봐 최대한 그쪽으로 시선이 가지 않게 조심했다. 단순히 '어르신이 적적하신가 보다.' 생각했다.
케언즈는 일본인이 많이 사는 도시라 일자리는 쉽게 구했다. 그날은 일을 마치고 2층 테라스에서 배를 먹고 있었다. 그림에서만 보던 호리병 모양의 서양배는 은은한 단맛이 매력적이었다. 흰색 철제의자와 테이블은 군데군데 칠이 벗겨져 페인트 조각이 덜렁거렸다. 가까이서 들리는 박쥐의 울음소리에 이곳이 외국임을 실감했다.
배의 속살은 다 갉아먹고 심만 남았다. 치우기가 귀찮아서 한 손에 쥐고 다른 손으로 폰을 보고 있는데 집주인이 나타났다. 별다른 말도 없이 슬그머니 내 맞은편에 앉았다. 프리토킹 상대가 나타나서 잘됐다고 생각했다. 당시 내 영어실력은 형편없어서 누구라도 붙잡고 연습을 해야 했다. 할아버지의 말을 이해하려고 귀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좋은 공부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난 여기서 방을 빌려준 지 오래됐어. 많은 여성이 이곳을 거쳐갔지. 그중에는 나와 꽤 가까웠던 애들도 있어. 뭐, 이런 말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알아듣는 것 반, 못 알아듣는 것 반으로 경청하고 있는데 이야기가 점점 이상하게 흘러갔다.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나오기 시작하자 속으로 물음표가 백만 개쯤 떴다. 이건 성희롱인가. 아니면 그저 성에 개방적인 서양 사람의 잡담인가. 머릿속에서 틱, 탁, 틱, 탁, 메트로놈의 바늘 소리가 들렸다. 당시 20대 후반이었던 나는 생각의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결혼을 한다고 다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지금 생각하면 참 어수룩했다.
할아버지는 중간중간 '혹시 이런 얘기가 불편하면 안 할게.'라며 추임새를 넣었다. 나쁜 의도가 없다는 듯 두 손을 내젓는 할아버지의 모습에 내가 예민한 건가 싶어 홀딱 넘어갔다. 성인끼리의 대화니까 괜찮은 걸 지도. 여기서 얘기를 끊으면 무례한 걸지도 몰라. 찜찜한 마음에도 부지런히 맞장구를 쳤다. 지금 돌아보면 일본에서 살다 온 지 얼마 안 돼서 그랬던 것도 같다. *타테마에가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내 한 마디에 할아버지가 상처받지 않을까, 이 분위기를 해치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이 컸다.
슬쩍 자리를 피해 방으로 돌아와 천천히 이야기를 되짚었다. 그가 했던 말이 성희롱이라는 결론에 다다르자 그제야 얼굴이 화끈거렸다. 동양인 여성만 거주하는 셰어하우스를 운영하는 이유가 이런 것이었나. 망할 영감탱이 같으니라고. 잠자리에 누워서도 쉬이 잠들지 못해 몇 번이나 이불을 걷어찼다.호주에 와서 처음으로 맺은 인연이 변태 할아버지라니. 어이가 없어 웃음만 나왔다.
그 후로는 의식적으로 집주인을 피했다. 동방예의지국에서 자란 탓에 면전에다 욕은 못해줬다. 대신 일자리를 바꾸는 걸 계기로 조용히 그 집을 떠났다. 아직도 셰어하우스를 운영하고 있다면, 부디 개과천선했기를 바란다. 그가 아직 이 세상에 남아 있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