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피의 법칙
그동안 고생 많았지. 많이 먹어라.
못 이기는 척 받기로 했다. 어머님이 말씀하신 미안하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기 때문이다. 시아버지 가게를 도왔을 때 남편이 얻은 반전셋방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 경매로 넘어갔다. 지지부진한 소송 끝에 결국은 전세금을 한 푼도 돌려받지 못했다. 시부모님은 그 손해를 갚아주고 싶었던 것이리라. 지난 과거의 상처가 돈으로 희석되는 걸 느낄 때는 스스로가 참 간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어머님이 하신 미안하다는 말속에 담긴 의미는 그저 돈을 뜻하는 게 아니었다. 지난 시절, 우리 세 가족이 함께하지 못했던 시간을 보상하고 싶었다고 하셨다. 그 마음이 내게는 더 큰 선물이었다. 시댁과의 관계 회복에서 오는 만족감 또한 컸다. 나도, 시부모님도 고루 보답받은 느낌이었다. 아버님과 어머님이 더 이상 고생하지 않고 안락한 노년을 보낼 수 있다는 생각에 더없이 행복하고 또 안심했다.
얘야, 나중에 너희한테 재산을 물려주면 재산세가 어마어마하게 붙더라.
차라리 너도 주식투자를 한 번
시작해 보는 게 어떻겠니.
어휴, 아버님. 저는 자신 없어요.
내가 잘 가르쳐 줄 테니까 걱정 안 해도 돼.
혹시 잘못되면 그만큼 메꿔줄 테니까.
네..? 아... 그래도...
차근차근 공부하면서 하면 돼.
혹시 시드머니는 얼마 정도 있니?
그런데 저희가.. 시드머니가 딱히 없어요.
너희 지금 전세 살고 있지 않니?
계약 언제 끝나니?
세 달 뒤요.
그래? 딱 좋네.
그럼 주인한테 월세로 바꾼다고
한 번 얘기해 봐라.
전세금 돌려받으면 그걸로 투자하면 되니까.
아... 네. 한 번 물어볼게요.
결국 인생은 언제나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아랫집과의 지리멸렬한 다툼 끝에 드디어 이사 갈 마음을 먹었는데 이런 일이 생기다니. 요즘 같은 시대에 집주인이 월세 제안을 마다할 리 없었다. 물론 다른 월세집을 찾아 이사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일단 투자하기로 마음먹었더니 이사비용이 아까웠다. 각종 전자기기의 재설치와 짐 포장도 번거롭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내가 왜 이사를 나가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억울한 심정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대로는 아랫집이 승리의 쾌재를 부르지 않겠는가. 그 꼴을 상상하자 배알이 틀렸다.
누구보다 조용한 생활을 해왔다고 자부할 수 있다. 어떤 가족이 이사를 와도 우리 집보다 조용할 리 없다. 문득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진짜 시끄러운 집이 이사를 온다면 과연 그녀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세 명의 영유아기 자녀를 거느린 애국자 집안이 우리 집에 들어오는 상상을 했다. 새벽마다 울려 퍼지는 아기의 울음소리, 아침 저녁 할 것 없는 네 명분의 발망치, 그리고 수십 개의 장난감이 바닥을 굴러다니는 소리. 아주머니는 귀를 막고 절규하겠지. '아아, 예전 집은 천사였구나. 미안해요, 잘못했어요.'라고.
후회하는 아주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는 건 꽤나 즐거웠다. 하지만 이 모든 상상이 현실이 되는 데는 하나의 전제가 필요했다. 내가 이사를 가는 것. 망상을 현실화시키기 위해 돈을 지불할 생각은 없었다. 역시 이사를 가지 않는 게 답인가. 모든 일이 얽히고설킨 채로 나를 시험하는 것 같다. 결국, 이 모든 아이러니를 받아들이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