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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영 Nov 15. 2024

인생은 이븐하게 굴러가지 않는다.

인생 한 방

 남편은 흔히 말하는 대문자 F다. 지독한 감성주의자다. 자신과 타인의 희로애락에 올라타 널을 뛴다. 그러다 발을 헛디뎌 마음이 과자처럼 바스러진다. 대 위 균형을 잡기가 쉽지 않은 걸까. 아내 된 도리로 손을 내민다. 고집은 세서 잡다가 말다가 한다. 연애 때는 '저러다 떨어질라' 안타까웠다면, 지금은 '떨어져 봐야 정신을 차린다'로 노선을 바꿨다.


 남편의 머릿속은 복잡하다. 지나간 오욕의 날순간순간 괴로워한다. 샤워 중에도, 설거지 중에도, 운전 중에도 ‘아, 싫다’는 말을 무심코 중얼거린다.


뭐가 싫은데?

아니, 아니야.



 저 밤톨 같은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그리 많을까. 나사를 풀어헤치면 조각난 옛 상처가 우수수 떨어질 것 같아 애달프다.


 지나간 과거는 바꿀 수 없다. 그래서 그럴까. 남편은 자주 미래를 설계한다. 몇 살에 결혼해서 얼마나 배를 탈 건지, 어떤 배 기관장이 돼서 몇 평짜리 집을 살건지, 몇 명의 아이를 낳고 어떻게 키우고 싶은지. 시작하는 연인의 풋내가 도는 카페 안 첫 데이트에서 남편은 말했다. AI급 진행 속도에 입이 떡 벌어지며 당황한 마음을 내비쳤다. 하지만 그는 다음 데이트에도 그다음 데이트에도 나와 함께 하는 미래를 구상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그가 말한 나이에 결혼을 하게 됐으니, 지금 생각하면 철저한 사기결혼이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계획한 대로 굴러가는 인생이 있을까. 남편에게 배를 타는 일은 고독의 연속이었다. 가족과 떨어져 몇 개월을 보내야 간신히 육지에 발을 붙였다. 그래서 이 일은 누구와 배를 타는지가 매우 중요하다. 자신과 안 맞는 상사를 만나면 내릴 때까지  나락이다. 


 임신 중이던 해, 남편은 악독한 상사를 만났다. 문제를 남에게 미루고 가르침조차 아까워했다. 남편은 인터넷을 검색하며 간신히 기계를 고치고 산더미 같은 서류 작업을 반복했다. 자기보다 어린 후배에게 짐을 나눠주기도 쉽지 않았다. 혼자서 고스란히 수라장 같은 8개월을 보냈다. 그때 찾아온 돌발성 난청으로 왼쪽 귀의 청력을 대부분 상실했다.


 

 그러니 다시 배를 타는 일이 얼마나 공포스러웠겠는가. 하선 후 아기를 낳고 새로운 가족의 형태를 이룬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남편은 다시는 배를 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대신 상경해서 시아버지를 도와 음식점을 운영하겠다고 통보했다. 한 번의 상의도 없는 일방적인 결정이었다. 지금은 그의 심정을 이해하지만, 그때 아니었다. 품 안에는 젖먹이 아기가 있었다. 지금껏 그가 들려 계획에 이런 이야기는 없었다. 커다란 배신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격렬하게 항의했지만 그는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 마치 날개옷을 빼앗긴 나무꾼의 아내가 된 것 같았다.


내가 ATM기야?



 당시 인터넷을 달군 유행어는 그의 입을 통해 내 가슴에 박제되었다. 돈을 벌어올 게 아니면 입을 다물어야 하는 입장이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가게가 안정될 때까지 나와 아이는 올라가지 않는 것. 남편은 시아버지 가게가 점점 규모를 키울 거라며, 조금만 고생하면 더 큰돈을 벌 수 있다고 했다. 희망찬 미래를 꿈꾸는 남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나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가게 근처에 반지하방을 구했다. 말끔한 인테리어에 새것 같은 방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스산했다. 믿음이 빠져나가 텅 빈 마음 아이 장난감으로 채웠다. 한 주는 우리가 올라가고 한 주는 남편이 내려왔다. 주말부부가 되어 가끔 보는 남편 시간이 지날수록 초췌해졌다. 쉬는 날 없이 가게에 매달리는 것에 비해 성과는 소박했다. 철이 들고 나서는 쭉 떨어져 살던 부모님과 갑자기 손발을 맞추는 게 쉬울 리 없었다. 반년의 방황 끝에 그는 결국 이 길이 아님을 깨닫고 일을 정리했다. 속으로 '그럴 줄 알았다'며 고개를 저었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이제 와서는 그가 벼랑 끝에서 나름 최선의 선택을 했다는 걸 안다. 실패하고 돌아왔으니 이미 그 대가는 충분 치른 셈이다.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그는 한국과 일본을 오가는 여객선에 취업했다. 해외로 나가는 배보다 월급은 적었지만 한 달에 일주일은 가족과 보낼 수 있었다. 상사도 부하직원도 좋은 사람이라 수월하게 적응했다. 애초에 아기를 가졌을 때 이직을 권유했던 회사였다. 이때다 싶어 '내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며 순종을 요구했다. 나의 맘고생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니 남편은 '네'라는 대답과 함께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그리고 그 관계는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으니 결국은 남는 장사라 하겠다.   


 우리 가족이 안정을 찾는 동안 시댁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버님과 남편의 동업은 나의 동의 없이 진행된 일이었어요'라며, 눈물과 함께 시댁을 한바탕 뒤엎은 전적이 있기에 사이는 서먹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노릇. 그래도 도리는 지키고 안부를 여쭈며 아무렇지 않은 척 며느리 가면을 썼다. 상냥한 시부모님은 항상 미안해하셨다. 그렇다고 마음속 응어리가 바로 사라지진 않았다.


 코로나 시기가 지나고 남편은 다시 대서양을 건넜다. 가족과 함께 한 시간만큼 의 마음은 튼튼해졌다. 긴 항해 끝에는 꼭 아이를 데리고 시댁을 방문했다. 어느 날 술상을 거하게 차려놓은 시부모님이 우리를 앉혀놓고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셨다. 무슨 폭탄선언이 있을까 내심 두려웠지만 두 분의 얼굴은 평온했다. 아니, 평소보다 여유로워 보였다.


 이야기인즉슨, 시어머니가 절연상태였던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물려받으셨단다. 시아버지가 그 돈을 주식에 투자하셨는데 그게 로또처럼 대박이 난 다. 자랑스레 휴대폰을 내미는 시아버지의 손 안 화면에는 몇 번이나 손가락을 움직여야 셀 수 있는 자릿수의 돈이 들어 있었다. 믿기지 않아 눈을 몇 번이나 깜빡였다. 헛웃음이 나왔다. 이건 보통 잭팟이 아니었다. 그간 고생하신 걸 알기에 진심으로 기쁘고 감격스러웠다. 아아, 정말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다. 인생은 절대 평탄하게 굴러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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