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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영 Nov 13. 2024

나는 나를 지킬 권리가 있다.

호의의 결말

 걸어가는 시금치 같다. 배정된 여고의 지정교복을 처음 봤을 때의 감상이다. 흰색, 검은색 같은 무난한 색을 놔두고 왜 하필 초록색일까. 촌스럽기 그지없다. 심지어 학교건물마저 교복과 같은 초록색이라니. 옥상 꼭대기에 박힌 육망성 모양의 창문은 사이비 종교의 아지트를 연상케 했다. 기독교 미션스쿨을 표방하는 학교라 다윗의 별을 상징으로 가져왔다는데 내가 알 턱이 있나. 친한 친구들과 뿔뿔이 흩어진 사춘기 소녀는 잔뜩 뿔이 났다.

 

 그 겨울, 같은 중학교 3학년 학생들 중 절반 이상이 이 고등학교로 올라왔다. 그런데도 교실에는 익숙한 얼굴이 없었다. 습관처럼 일찍 등교해 맨 앞자리를 잡고 앉았다. 들어오는 아이마다 낯선 얼굴이었다. 가져온 노트에 그림을 그리며 의기소침는데 누가 톡톡 말을 걸었다.


안녕? 옆에 앉아도 돼?


응.



 나중에 베스트 프렌드가 되는 이 친구는 내 첫 응답이 싸가지가 없었다고 회상한다. 바로 옆 중학교에서 온 아이는 두 명의 다른 친구와 함께 이 반에 배정됐다. 여자애들 사이에서 셋은 애매한 숫자다. 둘 아니면 넷. 이렇게 짝수로 다니지 않으면 꼭 한 명이 소외되는 일이 생한. 친구는 처음부터 그걸 염두에 두고 한 친구를 더 물색했단다. 감이 좋고 똑 부러지는 친구였다. 그 계획적인 레이더망에 걸린 게 바로 나였다.


 옆으로 주르륵 앉은 그녀의 친구들과 어색한 인사를 나눴다. 얼굴을 익힐 시간도 없이 담임 선생님이 들어왔다. 지구과학을 담당하는, 키가 크고 머리가 반쯤 벗겨진 남자 선생님이었다. 딱딱한 분위기를 풀려고 썰렁한 농담을 던지셨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다. 교실은 신학기 특유의 긴장과 흥분, 두려움이 섞여 단단하게 굳은 젤리 같았다. 생님은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이 시작된다며 모두 강당으로 모이라고 하셨다. 이미 친한 아이들, 안 친한 아이들이 눈치를 보며 삼삼오오 떼를 지어 밖으로 나갔다.


 일제강점기에 산을 깎아 만들어진 학교는 구조가 매우 복잡했다. 촘촘히 붙어있는 건물 사이로 미로 같은 좁은 통로가 이어졌. 고등학교의 실세인 고3 선배들은 육망성이 붙어 있는 본관을 썼다. 1, 2학년은 본관 오른쪽에 붙어있는 별관에서 오손도손 공부해야 했다. 불편하게도 별관 화장실은 외부에 있었다. 수업이 끝나면 추운 날씨에도 바깥으로 나가 용변을 봐야 했다. 여자애들은 친근함의 척도로 화장실 같이 가기 기술을 사용한다. 이동거리가 길다 보니 스킬의 사정범위를 넓혀야 해서 번거로웠던 기억이 난다.  


 강당으로 가기 전 우리 4명은 화장실에 들렀다. 말을 걸어온 친구와는 짧은 사이에 어색함이 풀려서 앞으로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손을 씻고 밖으로 나왔더니 다른 친구 하나가 계단 위에 서 있었다. 어색함을 풀어보려고 용기를 내어 말을 붙였다.


 벌써 배고프네.
얼른 점심시간 됐으면 좋겠다, 그치?



 잡담주제로는 괜찮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생긋 웃는 얼굴로 말을 걸었는데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위에서 팔짱을 끼고 내려다보던 그녀가 명백한 거절의 눈빛을 보내왔다. 분을 바른 듯 하얀 얼굴가면처럼 딱딱했다. 그녀 둘러싼 나를 향한 거부감이 오라처럼 일렁여서 속으로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머지 친구들이 화장실에서 나오자 각자 다른 친구의 팔짱을 끼고 강당으로 향했다. 이상했다. 그렇게 노골적인 적대감이유 없이 드러내는 또래아이는 처음이었다. 곧 내 기분도 불쾌해졌다. 설령 앞으로 친한 사이가 된다고 해도 잊힐 것 같지 않았다. 마음 깊이 상처받았다.



 어디서 본 듯한 눈빛이었다. 단지 내에서 우연히 마주친 아랫집 아주머니의 눈동자는 그 아이를 꼭 닮아 있었다. 작은 호의는 통하지 않았다. 매번 기대하고 매번 좌절했다. 누군가 나를 싫어한다는 건 아무리 물을 줘도 자라지 않는 씨앗을 돌보는 것과 같다. 이유를 알기 위해 땅을 파면 팔수록 손끝이 새까매진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무력감에 스스로를 탓하게 될 때도 있다. 결국,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관계는 깊은 좌절감에 빠져들고 만다.


 그 누군가를 내가 좋아하느냐, 아니냐는 상관없다. 열린 문 안으로 밀려드는 물결을 따라 억눌린 감정들이 범람한다. 지붕에 올라가 홍수에 떠내려가는 희망을 바라보며 이제는 건지려는 시늉조차 하지 않다. 아주머니차가운 눈초리에 드디어 씨앗을 포기하기로 한다. 닿지 않은 호의는 회수당했다. 나도 내 마음을 지킬 권리가 있으므로.


 몇 개월 뒤면 전세 계약이 끝난다. 미련도 기대도 내려놓은 채, 나는 이사를 가기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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