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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영 Nov 10. 2024

네모의 꿈

둥글게 살고 싶다.

  꼬리를 말고 도망가버렸나. 조언을 이행하기 위해 아주머니의 등장을 조바심 내며 기다렸다. 하지만 방문은커녕 호출도 잠잠해졌다. 경찰에게 스토킹에 대한 설교를 들은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공권력의 힘이 참 대단하구나. 동시에 그동안 우리를 얼마나 쉽게 봤나 싶어 부아가 치밀었다.


 곱게 포장된 고소장을 선물하고 싶었는데 아쉽다. 한계치에 다다른 스트레스 에너지가 그녀를 '마귀몬'으로 진화시켜 줄텐데. 하지만 내가 받을 대미지도 상당하지. 멈출 수 있다면 여기서 멈추는 게 제일 좋다. 소송은 생각 이상으로 지루하고 힘든 과정이. 어떻게 알고 있냐고? 이 경험은 다음에 풀도록 하자.


 연락이 없으니 살 것 같다. 여전히 조마조마하지만 무슨 일이 생기면 사진을 찍고 경찰에 신고하면 된다. 든든한 조력자가 생긴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그렇다고 일상이 크게 달라진 건 아니었다. 우리는 여전히 뱀처럼 조심조심 걸었다. 실수로라도 물건을 떨어뜨리지 않으려 조심했다. 구슬이 든 문제의 장난감은 뚜껑을 닫아 봉해버렸다. 그렇게나 갖고 싶어 하던 장난감인데 아이는 꺼내달란 소리를 한 번 안 했다. 어린이 완구가 재앙의 불씨가 되는 장면을 목격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비싸게 주고 샀는데. 아랫집에 청구서를 보내버릴까 보다.


 매일 외출하는 일상도 여전했다. 한 번 자리 잡은 습관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거기다 주말은 도서관 프로그램의 천국이다.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고 유익한 정보를 배운다. 수업이 끝난 뒤의 독서시간은 공복의 물 한 잔처럼 귀중하다. 오케스트라, 마술, 연극 등 다양한 공연이 주기적으로 열리는 점도 도서관의 매력 중 하나다. 대부분 무료이기 때문에 가족이 많아도 부담이 없다.


 하지만 아이 교육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나 혼자가 아니다. 좋은 경험을 위해서는 흔히 말하는 '광클'이 필요하다. 가령, 10시부터 수업이 시작되면 최소 10분 전에 접속하고 초시계를 준비해 둔다. 초시계의 얇은 바늘이 마지막 1분을 채우는 것과 동시에 새로고침 버튼을 누른다. 인기 있는 강좌나 공연은 대개 5분 이내로 마감된다.



 나는 이른바 '금손'으로 불리는 능력자로 듣고 싶은 수업은 웬만해선 놓치지 않는다. 인터넷 수강 신청계의 마이더스 셈이다. 이 기술은 오랜 수련의 결과로 코로나 시기를 거치며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대면 수업을 포기한 전국 각지의 센터와 박물관이 비대면 교육 키트를 배포했기 때문이다. 무료배송에 한정수량이라 빠른 클릭만이 살길이었다.

 

 갈고닦은 실력을 발휘해 유명 작가의 라이브페인팅 공연 신청에 성공했다. 주말이라 차가 밀릴 것 같아 일찌감치 출발했다. 시청 안에 위치한 열린 도서관 커다랗게 걸린 예술작품과 높은 층고 덕분에 미술관 같았다. 거리가 있어 자주 못 오는 곳이아이와 나는 무척 들떴다. 대출이 안 되는 곳이기에 책 상태도 매우 좋았다.


 행사에 참여한 어린이에게 작은 돗자리, 오일 파스텔, 커다란 도화지가 하나씩 제공되었다. 무대 중앙에서는 이제부터 시작될 공연에 앞서 준비가 한창이었다. 일찍 온 사람부터 돗자리를 펴고 자리에 앉다. 작가님의 라이브페인팅에 맞춰 아이들도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는 행사였다.


 보호자님들은 다들 옆으로 나가주세요.


 응? 공지에 없던 안내에 몇몇 학부모가 당황했다. 그중에는 나도 포함이다. 아이와 멀지 않은 소파에 빈자리가 있어 조용히 떨어져 앉았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아들의 얼굴은 울상이 됐다. 도서관이라 입만 뻐끔거리며 아이를 다독였더니, 아이도 입만 뻐끔거리며 징징댔다. 떨어져 있는 거리도 아구만. 마음속에 참을 인자를 새기며 입꼬리를 치켜들었다. 마치 조커 같았으리라.


 작가님의 공연이 시작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바로 앞자리에 앉은 아이가 자리를 이탈했다. 여러 차례 다독여도 진정되지 않자 보호자는 한숨을 쉬며 돗자리와 함께 퇴장했다. 아이고. 저 엄마도 치열한 경쟁을 뚫고 신청했을 텐데. 지켜보는 내가 다 속상했다. 근데, 그건 그렇고, 내 앞자리가 비었네. 미안하지만 이 자, 제가 좀 쓸게요. 약삭빠른 엄마는 아들을 호출했다. 짧은 다리를 힘껏 뻗어 내 앞으로 왔다. 일찍 와서 잡은 명당자리는 다른 아이 차지가 됐다. 엄마 속도 모르고 아이는 그제야 편한 미소를 짓는다. 아이고, 아이고.



 돗자리도 도화지도 크기가 넓어서 다들 조금씩 겹쳐서 자리를 깐 상태였다. 내 바로 옆에 앉은 여자 아이의 돗자리도 소파 아래까지 닿아 있어서 발을 놓을 자리가 애매했다. 최대한 방해되지 않도록 발가락을 오므렸다. 앞에서 자꾸 돌아보는 아들내미에게 눈빛으로 협박을 날렸다. 그때였다.  

  

 다리 좀..!
애 자리를 자꾸 밟잖아요..!



 뭐지, 이건. 처음 보는 남자가 내 허벅지를 강하게 쥐었다 놓았다. 아니, 쥐었다기보다는 들었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이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남자와 내 발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돗자리 귀퉁이를 살포시 밟고 있는 내 발이 문제라는 거지, 지금. 상황을 파악하고 나니 참을 수 없는 불쾌함몰려왔다. 누군가 내 방을 흙발로 밀고 들어와 엉망으로 만든 기분이었다. 서슴없는 터치와 노골적인 적대. 이 사람이 지금 제정신인가.


 아저씨, 지금 뭐 한 거예요?

 아니, 계속 애 자리를 밟잖아요.

 내가 애 손을 밟았어요,
하다못해 도화지를 밟았어요?
그럼 뭐, 발을 공중에 들고 있으란 말이에요?

 아니, 그게 아니라...

 좋은 자리에 애 앉히고 싶었거든
빨리 와서 자리를 잡던가.
지금 애들 다 있는 자리에서
뭐 하는 짓이에요?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서 있는 학부모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혼자서 뭐라 중얼거리더니 뒤로 사라졌다. 신종 미친놈인가. 세상에 이렇게 미친 사람이 많을 줄이야. 시간이 지날수록 수치심에 얼굴이 벌게졌다. 뭐라고 더 쏘아붙이지 못한 게 한. 어디서 집에서 하고 있는 버릇대로 남한테 함부로 구냐고. 딸 앞에서 창피당하고 싶지 않으면 행동거지 제대로 하라고. 


  남자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여자 아이는 시종일관 불안해 보였다. 릎을 꿇었다가 폈다가, 겹쳐진 도화지를 밀었다가, 접힌 돗자리 자국을 없애려고 문질렀다가. 자리가 불편한지 계속 을 꿈틀거렸다. 떨어져 있는 아빠가 보기에 소중한 딸의 돗자리에 냄새나는 발을 올려놓내가 대역죄인이었나 보다. 랫집에 이어 이런 사람까지 만나다니. 짜 굿이라도 해야 하나.


 아이는 사라진 아빠를 찾아 두리번거리다 입을 열었다. '아빠, 이거 안 하고 싶어. 집에 갈래.' 그리고는 짐을 챙겨 홀랑, 사라졌다. 그러니까 세상에는 두 종류의 부모가 있는 거다. 아이가 불안한 태도를 보일 때 받아줄 수 있는 부모와 그렇지 못한 부모. 오늘의 딸바보 아저씨는 후자였다. 자신의 무능을 남 탓으로  돌리니, 부끄럽지 않은가.


 공연은 무사히 끝나고 아이도 이쁘게 그림을 완성했지만 내 기분은 최악이었다. 한 편의 막장 시트콤을 찍고 돌아온 것 마냥 몸도 마음도 무거웠다. 허벅지에 닿았던 신경질적인 촉감이 생생했다. 당시의 기분 나쁜 상황이 시커먼 슬라임처럼 옷에 붙어 집까지 쫓아왔다. 칫솔질로도 지워질 것 같지 않았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엘리베이터를 내렸다. 얼른 들어가서 샤워해야지. 언짢은 기분을 한시라도 빨리 씻어내자며 불운의 모래를 털었. 큰 걸음으로 현관문 앞에 섰을 때, 낯선 분홍색 포스트잇이 눈에 띄었다. 네모 반듯한 종이에는 검은 글자가 빼곡히 적혀있었다. 아이가 보기 전에 재빨리 떼어 손으로 구겼다. 문을 열어 아이를 먼저 들여보냈다. 바스락바스락. 주머니 속 종이조각이 소리낸다. 오늘 분의 시트콤은 아직 끝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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