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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영해 Nov 12. 2024

니가 왜 거기서 나와.

집 없는 자의 슬픔

야밤에 베란다에서 물 흐르는 소리,
물 떨어지는 소리 좀 안 나게 해 주세요.
당신들 때문에 밤에 잠을 못 잡니다.


 방문과 호출, 경찰을 넘어 이번에는 쪽지가 왔다. 매운맛에서 순한 맛으로 강등한 건가. 아님, 지나가는 입가심용 디저트인가. 깃꾸깃 구겨진 종이를 한참 동안 들여다다. 한글로 적혀있는 게 분명한데 해석이 안 다. 미간을 찡그리고 한 문장씩 번역에 들어갔다.


 요즘 아파트가 대부분 그렇듯 확장형 거실은 베란다가 없다. 대신 우리 집은 주방 옆과 안방 안에 작은 다용도실이 딸려 있다. 주방 옆에는 세탁기를 설치해서 세탁실이라 부른다. 빨래를 하는 공간이므로 당연히 물소리가 발생한다. 오수가 흘러가는 소리는 긴 배관을 통해 아래로 내려간다. 수도관은 같은 라인 집들이 함께 공유하므로 물소리만 듣고 누구 집인지 찾아내는 건 불가능하다. 혹시 아주머니는 심야의 세탁소리를 거슬려한 걸까. 하지만 우리는 늦은 밤에 빨래를 돌린 적이 없다. 혹시 몰라 세탁실 구석구석을 살폈다. 물이 새는 곳은 없었다.


 안방 쪽 베란다에는 하향식 피난구가 설치되어 있다. 위급상황에서 뚜껑을 열면 사다리가 펼쳐져 아래층으로 내려갈 수 있다. 사용하면 경고음이 울리고 관리실로 연락이 간다. 아이와 안전체험관에 가서 놀이기구처럼 체험했던 기억이 난다. 아직 실제로 사용해 본 적은 없고 그럴 일도 없었으면 한다. 층간소음 분쟁이 시작된 후로는 '불이 나도 저기로는 안 도망가고 싶다'라고 중얼거린 적은 있다.


 피난구 덮개 옆에는 청소용 샤워기가 설치되어 있다. 사용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뚜껑 틈새로 물이 샐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물청소 금지라고 입주할 때부터 단단히 주의를 받았다. 잊을 만하면 아파트 방송으로 안내가 나오고 엘리베이터에 경고장이 붙는다. 제법 흔한 실수인가 보다. 어쨌든 우리 집은 마른걸레로 먼지를 훔칠 뿐 물을 뿌린 적 없다. 럼 도대체 어디서 들리는 소리고.


 고심하며 베란다를 한 바퀴 휙 둘러보았다. 쌓아둔 여행 캐리어 사이로 은색 손잡이가 눈에 띄었다. 아, 맞다. 여기에 실외기실 있었다. 에어컨을 사용할 때 빼고는 쓰지 않는 방치된 기억이다. 튼튼한 선반이 놓인 여분의 공간이지만 굳이 사용하지 않는다. 실외기의 열기 때문에 물건이 망가질까 걱정되기 때문이다. 에어컨을 사용할 때면 안에 들어가 블라인드만 살짝 열 나온다.


 그런데 여름이 나고 블라인드를 닫았던가, 말았던가. 기억이 안 난다는 건 안 닫았다는 사실에 한없이 가까워진다. 설마 거기서 물소리가 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문을 열기 전에 최악의 경우를 상정해 다. 장마 때 들어온 빗물이 바닥에 찰랑찰랑 고여있다. 배수구가 막혀서 물이 못 내려간 거다. 흐르는 시간은 쌓인 먼지에 구멍을 내어 물을 흘려보낸다.  졸 졸. 조금씩 새는 물소리가 밤의 적막을 뚫고 아랫집 아주머니의 고막을 매일 밤 괴롭힌다. 최악이 아니라 최고의 상상이었. 나 몰래 그런 복수가 이뤄졌다면 낮 동안의 불쾌한 기억은 잊고 오늘 밤 숙면에 들 수 있으리라. 


  위로 솟은 어깨가 하강하며 모은 공기를 뱉었다. 긴장으로 굳은 몸을 가볍게 풀었다. 일단 열어보자. 앞으로 뻗은 오른손이 문 손잡이를 강하게 쥐었다. 떻게 됐을지 몰라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푸드덕푸드덕



 문을 염과 동시에 무언가가 블라인드 틈으로 빠져나갔다. 새다. 아마도 비둘기겠지. 니가 왜 거기서 나오니. 황당한 마음으로 실외기실 불을 켰다. 다행히 물은 고여있지 않았다. 대신 새똥투성이었다. 했다. 남한테 복수하는 상상을 한 벌을 일찍도 받았다. 실외기 구석에지푸라기로 엉성하게 엮인 둥지가 보였다. 덥고 시끄러웠을 텐데 용케도 여기서 살았구나.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보금자리에는 세 개의 뽀얀 알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아. 나는 새똥투성이가 된 방을 마주하고도 문을 계속 열어둘 만큼의 호인은 못 된다. 거기다 비둘기는 한 번 자리를 잡으면 좀처럼 떠나지 않는다 한다. '영원히 함께 할 마음이 없다면 지금 헤어지는 게 서로에게 좋을 것 같아.' 애인에게 할 법한 이별의 대사를 남기고 블라인드를 닫았다. 


 순식간에 집도 잃고 자식도 잃은 비둘기가 가여웠다. '미안하다. 마음껏 원망해라.'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비바람을 피해서 쉴 곳을 찾았을 뿐인데 야박한 집주인은 마음이 좁구나. 알을 품을 때마다 갑자기 돌아가는 실외기 소리에 얼마나 놀랬을까. 인터폰 소리에 화들짝 놀라는 내 모습이 떠올라 문뜩 서글퍼졌다.  


 결국 물소리의 원인은 찾지 못했다. 예전 같았으면 '저 미친 아줌마가 다시 발작을 일으켰군'하고 쪽지를 박박 찢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집을 나간 비둘기 지성 물고 왔기에 침착을 유지할 수 있었다. 보금자리를 잃은 비둘기에게 사과하지 못하는 대신, 그 미안한 마음을 담아 아주머니에게 쪽지를 쓰기로 했다. 곱게 그리고 상냥하게.


세탁실을 말씀하시는 거면,
저희는 심야에 빨래를 하지 않습니다.
안방 베란다를 말씀하시는 거면,
물청소가 금지되어 있는데
어떻게 물소리가 나겠어요.
혹시 어디선가 물이 새는 거라면
조치를 취할 테니 연락 주시길 바랍니다.  


 틀리거나 불쾌한 표현은 없는지 몇 번이고 확인했다. 예쁜 포스트잇을 골라  자, 한 자 정성껏 옮겨 적었다. 내일 아침 일찍 아랫집에 붙이고 와야지. 부드러운 내 반응에 아주머도 예민한 마음을 조금쯤 내려놓을지도 모른다. 이에는 이로 답하는 날카로운 세상에서 조금이라도 둥근 마음을 갖자고 생각했다. 상대방의 뾰족함에 긁힐지라도 서로를 찔러 터지는 일은 없게. 시간이 지나 모난 부분이 뭉툭해지면 조심스레 다가가 서로 안아봐도 좋지 않을까. 그날은 눈을 감자마자 바로 잠이 들었다. 나를 면에 들게 한 건 복수가 아니라 관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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