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영 Nov 16. 2024

아버님은 계획이 다 있으시군요.

머피의 법칙

 시아버지의 아버지는 안동에서 이름난 변호사셨다. 실력과 인품 모두 뛰어나 돈 없는 사람은 대가를 받지 않고 도와주셨다. 많은 사람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훌륭 분이다. 시아버지는 그런 아버지의 베푸는 삶을 보고 자라 배고픈 사람을 배부르게 하는 요리사의 길을 택했다. 마을에 몇 없 서양식 레스토랑을 개원해 맛집으로 성공하셨다. 남편은 그 집 장남으로 태어나 이쁨을 듬뿍 받고 자랐다. 당시 아이들이 특별한 날에 엄마, 아빠를 졸라 짜장면을 먹었다면, 남편은 '오늘도 돈가스야?'를 외치며 풍요롭고 건방진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IMF가 찾아왔다. 전국의 수많은 가게가 셔터를 내렸다. 시아버지의 레스토랑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버님은 가족을 데리고 야반도주를 할 만큼 궁지에 몰렸다. 여러 가게를 전전하며 생활비를 벌고 몇 번의 창업을 시도하셨다. 하지만 우후죽순처럼 늘어나는 자영업자 속에서 예전의 영광을 되찾기란 쉽지 않았다. 남편과 함께 한 가게에서도 얻는 것에 비해 고생이 심했다. 요리솜씨가 좋아 단골이 많았지만 인건비 절약을 위해 주말도 없이 일을 하셨다. 도저히 체력이 받쳐주지 않아 가게를 정리하셨는데 그 직후에 코로나 사태가 터지고 말았다. 새로운 가게를 엄두도 내기 어려운 상황에서 눈을 돌리신 게 바로 주식이었다.


 평생 요리사의 길을 걸어온 아버님이 주식을 시작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코로나로 인해 새로운 가게를 열 상황이 아니었다.', '그동안의 과로로 몸 상태가 안 좋았다.', '때마침 목돈이 생겼다.' 세 가지 조건이 운 좋게 맞아떨어졌기에, 비로소 새로운 도전에 첫 발을 내디딜 수 있었다. 게다가 아버님은 하나에 몰두하면 끝까지 파고드는 성격이다. 매일 신문과 뉴스를 탐독하고, 필요할 땐 외국 논문까지 읽었다고 하셨다. 주가 하락으로 불안에 시달리는 날도 있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내연기관 자동차를 대신하여 전기차 공급이 많아질 거라 예상한 아버지는 고심 끝에 2차 전지에 투자해 막대한 수익을 이뤄냈다.


그동안 고생 많았지. 많이 먹어라.


 시부모님은 '그간 너희가 겪은 고생을 안다'며 무엇이든 베풀어 주려 하셨다. 아이에게는 옷과 장난감을, 우리에게는 두둑한 용돈을 챙겨주셨다. 받기만 하 성미가 못돼서 유행하는 가전을 사서 보내드렸다. 로봇청소기, 음식물 처리기, 바디 드라이어 등 무엇을 선물해도 시부모님은 만족해하셨다.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니 그저 흐뭇했다. 얼마 전에는 어머님이 전화가 오셔서 아이 선물로 골드바를 사놨다고 하셨다. 사진으로 보니 가격이 상당해 보였다. 괜찮다고, 재투자하시라고 말씀드렸지만 한사코 '미안해서 그러니 받아 달라'라고 하셨다.

 

 못 이기는 척 받기로 했다. 어머님이 말씀하신 미안하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기 때문이다. 시아버지 가게를 도왔을 때 남편이 얻은 반전셋방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 경매로 넘어갔다. 지지부진한 소송 끝에 결국은 한 푼도 돌려받지 못했다. 시부모님은 그 손해를 갚아주고 싶었던 것이리라. 지난 과거의 상처가 돈으로 희석되는 걸 느낄 때 스스로가 참 간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어머님이 하신 미안하다는 속에 담긴 의미는 그저 돈을 뜻하는 게 아니었다. 지난 시절, 우리 세 가족이 함께하지 못했던 시간을 보상하고 싶으셨다고 하셨다. 그 마음이 내게는 더 큰 선물이었다. 시댁과의 관계 회복에서 오는 만족감 또한 컸다. 나도, 시부모님도 고루 보답받은 느낌이었다. 아버님과 어머님이 더 이상 고생하지 않고 안락한 노년을 보낼 수 있다는 생각에 더없이 행복하고 또 안심했다.



 어느 날, 평소처럼 걸려온 전화에서 아버님은 말씀하셨다.



얘야, 나중에 너희한테 재산을 물려주면 재산세가 어마어마하게 붙더라.
차라리 너도 주식투자를 한 번
시작해 보는 게 어떻겠니.

 어휴, 아버님. 저는 자신 없어요.

내가 잘 가르쳐 줄 테니까 걱정 안 해도 돼.
혹시 잘못되면 그만큼 메꿔줄 테니까.

 네..? 아... 그래도...

차근차근 공부하면서 하면 돼.
혹시 시드머니는 얼마 정도 있니?

 


 주식이라니. 아버님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두려움과 설렘이 동시에 일었다. 돈을 잃을까 봐 걱정돼서 한 번도 시도해 본 적이 없는 투자 방식이었다. 지만 리스크가 생기면 메꿔주겠다는 말에 마음이 동하지 않을 리 없었다. 이 기회가 아니면 언제 또 이런 도전을 해보겠나. 두려움을 딛고 나아가는 것이 인생의 본질이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데 저희가.. 시드머니가 딱히 없어요.

너희 지금 전세 살고 있지 않니?
계약 언제 끝나니?

세 달 뒤요.

그래? 딱 좋네.
그럼 주인한테 월세로 바꾼다고
한 번 얘기해 봐라.
전세금 돌려받으면 그걸로 투자하면 되니까.

 아... 네. 한 번 물어볼게요.



 결국 인생은 언제나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아랫집과의 지리멸렬한 다툼 끝에 드디어 이사 갈 마음을 먹었는데 이런 일이 생기다니. 요즘 같은 시대에 집주인이 월세 제안을 마다할 리 없다. 물론 다른 월세집을 찾아 이사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일단 투자하기로 마음먹었더니 이사비용이 아까웠다. 각종 전자기기의 재설치와 짐 포장도 번거롭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내가 왜 이사를 나가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억울한 심정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대로는 아랫집이 승리의 쾌재를 부르지 않겠는가. 그 꼴을 상상하자 배알이 뒤틀렸다.


 누구보다 조용한 생활을 해왔다고 자부할 수 있다. 어떤 가족이 이사를 와도 우리 집보다 조용할 리 없다. 문득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진짜 시끄러운 집이 이사를 온다면 과연 그녀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세 명의 영유아기 자녀를 거느린 애국자 집안이 우리 집에 들어오는 상상을 한다. 새벽마다 울려 퍼지는 아기의 울음소리, 아침 저녁 할 것 없는 네 명분의 발망치, 그리고 수십 개의 장난감이 바닥을 굴러다니는 소리. 아주머니는 귀를 막고 절규하겠지. '아아, 예전 집은 천사였구나. 미안해요, 잘못했어요'라고.


 후회하는 아주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는 건 꽤나 즐거웠다. 하지만 이 모든 상상이 현실이 되는 데는 하나의 전제가 필요했다. 내가 이사를 가는 것. 망상을 현실화시키기 위해 돈을 지불할 생각은 없었다. 역시 이사를 가지 않는 게 답인가. 모든 일이 얽히고설킨 채로 나를 시험하는 것 같다. 아. 참으로 아이러니한 인생이다.    


 








이전 20화 인생은 이븐하게 굴러가지 않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