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영 Nov 17. 2024

나의 옛날이야기

예민한 사람이 되기까지

 '처서매직'이라는 신조어가 있다. 아무리 더워도 처서가 지나면 마법처럼 시원해진다는 뜻에서 생겨난 말이다. 올해 여름은 처음으로 처서매직이 통하지 않았다. 차 안은 오븐처럼 달궈지고 따가운 햇살이 생살을 파고들었다. 조상들의 지혜라며 신봉했던 절기는 지구온난화로 인해 신기 떨어진 당취급을 받게 됐다. 달라진 계절의 법칙처럼 내 일상도 더 이상 안정적이지 못했다. 예측불가능한 소리의 침략자는 여러모로 내 삶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11월 말이면 전세 계약이 끝난다. 가을에 막 진입했을 무렵에는 이사할 시기가 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때쯤이면 이 더위도 가시겠지.', '괜찮은 이사업체를 구해야 할 텐데.', '언제쯤 집주인에게 나간다고 말씀드려야 할까.' 여러 가지 계획들로 머릿속 붕 떠있었다. 그런데 아버님의 전화 한 통 떨어진 시계추가 되어 이사에 대한 모든 생각을 멈춰버렸다. 팔자에도 없는 주식 공부를 시작하게 되다니. 이 참 롤러코스터다.  


 집주인아저씨는 흔쾌히 전세에서 월세로의 전환을 허락해 주셨다. 남편도 내 의견에 전적으로 따른다고 답을 보내왔다. 그런데 문제는 아랫집이다. 마지막 싸움에서 던진 말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11월이면 전세 만기예요.
아줌마 때문에 도저히 못 살겠으니까, 소원대로 이사 나가 줄게요.
그때까지만 우리 서로 참고 살아요, 예?



 약속을 지킬 의리 따위 없다. 하지만 그녀가 11월이 오기만을 고대하며 버티고 있는 거라면 어떡해야 할까. 겨울바람과 함께 들이닥쳐 약속을 어겼다며 난리를 친다면. 실망한 아주머니가 무슨 짓을 벌일지 생각하면 손바닥이 축축해진다. 연락이 오는 횟수가 줄었어도 아랫집이 나에게 보내는 부정적인 에너지는 여전다. 악의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칠수록 가라앉은 일상은 나를 단단히 옭아맸다. 하나로 이어진 천장과 바닥처럼 우리서로에게 단단히 연결되어 있다. 애정과 증오는 종이 한 장 차이라더니 마치 연인 사이 같지 않은가. 척추 끝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걸까.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장기간 추궁당하면 없던 트라우마도 생길 수 있다. 하지만 원래의 나는 좀 더 대담하고 진취적이었던 것 같다. 몸과 마음이 쪼그라든 이유가 궁금했다. 생각해 보니 집 안을 잠식한 우울과 권태는 층간소음이 생기기 전부터 조금씩 생겨났다. 벗어나기 힘든 상념이라면 차라리 맞붙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사유의 시간을 가지게 해 준 아주머니께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겠다. 누구처럼 남 탓만 하며 살기에는 인생이 아까우니까 말이다. 그렇기에 이 생각을 시작으로 잠시 내 이야기를 꺼내보려 한다.       



 때는 90년대 후반. 1차 대중문화개방이 이루어진 후 나는 만화책에 푹 빠져 있었다. 식민지배에 대한 반감으로 유입이 금지됐던 일본 만화와 음반을 접하며 세상이 뒤집힌 느낌이었다. 또래 아이들이 아이돌에 빠지고 사랑노래가 전국을 강타할 때였다. 갓 사춘기를 맞이한 나는 도무지 그놈의 '사랑'이라는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여자중학교라서 그랬을까. 옆에 없는 이성친구보다 판타지 이야기가 훨씬 재밌게 느껴졌다.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을 원어로 즐기고 싶었다. *NHK 채널에서 녹화한 영상의 대사를 외울 때까지 돌려봤더니 자연스레 귀가 트였다. 일본어로 말할 때면 만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아 무척 신이 났다. 일본에 대한 혐오와 선망이 뒤섞인 채로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때는 진로상담이라는 개념이 희미했다. 미래에 대한 고민보다는 그저 수능 성적에 맞춰서 대학에 가던 시절이었다. 특히, IMF 직후에는 안정적인 직업이 대세였다. 부모님은 사범대에 진학해 선생님이 되기를 바라셨다. 이거다 하는 꿈이 없었기에 순순히 그 의견을 따랐다. 


 전혀 관심 없는 분야의 공부를 하는 건 고욕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행동한 대가를 이렇게 치르는구나 싶었다. 나는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싶은 사람이다. 자유로운 영혼을 빙자한 철부지인 셈이다. 고3 시절 엄마가 보낸 독서실에서 만화책의 달인이 되었고, 학교 야자시간에는 옥상에 올라가 별을 감상했다.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휴학계를 제출하고 반년 뒤 일어교육과로 전과했다. 그리고 반년 뒤 교환학생으로 일본에 다녀와서 임용을 준비했다.


 당시 비인기 교과였던 독일어, 프랑스어 교사들이 일본어 과목을 이수해서 일어 교사로 전환하는 사례가 빈번히 일어났다. 지방에서 고속버스를 대절해 선배, 후배 할 것 없이 서울로 올라가 항의 시위를 벌였다. 눈물을 흘리며 머리를 깎는 어느 대학 선배의 모습에 연민보다는 이질감을 느꼈다. 스스로를 돌이켜 봤을 때 저만큼 간절하지도 않았고 희미한 끈기조차 없었다. 이 바뀌어도 임용이라는 바늘구멍을 통과할 자신이 없어 시험을 깨끗이 포기했다. '너 자신을 알라'를 실천한 뛰어난 메타인지의 소유자였음을 밝혀둔다.


 대신 졸업과 동시에 어학원에 취직했다. 거기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넌 학생이고 난 선생이야'를 외치며 사랑에 빠졌다. 군복무를 위해 배를 타러 가야 하는 걸 알고 내가 먼저 일본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일본어 실력도 쌓고 돈도 벌면 일석이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외취업을 하고 일본 생활을 했다. 큰 지진을 겪고 한국으로 돌아와 결혼식을 올렸다.  


 신혼여행 목적지는 필리핀 세부였다. 우리는 거기서 한 달간 어학연수를 받았다. 함께 영어를 배우고 남편은 다시 배를 타러, 나는 호주로 워킹 홀리데이를 떠났다. 일본으로 떠날 때와 마찬가지였다. 영어도 배우고 돈도 벌고 일거양득이지 않는가. 그 시절의 나는 누군가의 눈치를 보며 살지 않았다. 포기가 빠를지언정 도전하길 좋아하고 망설일 시간에 일단 전진하는 스스로가 좋았다. 싫은 건 단호하게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초인종 소리 하나에 심장이 덜컹이고 윗집 발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예민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욕하던 아랫집 아주머니를 닮아가는 내 모습에 자괴감이 밀려왔다. 대범했던 나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변해버린 걸까.


 눈을 감고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변화의 시작은 어디였을까. 흐릿했던 과거의 기억이 퍼즐조각이 되어 그림을 맞춘다. 액자틀에 끼우고 나니 초점을 맞춘 것처럼 선명해진다. 그렇다. 내 마음이 움츠러들기 시작한 건 호주에서 겪은 이상한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비롯되었다.



*NHK: 일본 공영방송 채널

이전 21화 아버님은 계획이 다 있으시군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