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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내 이메일함에 나타났다, 목적은 단 하나

백수 남편과 이혼할 수 없는 이유

by 애기곰
이메일로 팔자 고친다는 말이 과장처럼 들리는가?


이슬아 작가의 <인생을 바꾸는 이메일 쓰기>의 광고 문구다.


팔자를 고친 건 아니지만, 이메일로 사람을 살린 적은 있다. 남편이, 나라는 사람을 살린 적이 있다.

나를 살리기 위해 남편은 내 메일함에 하루도 빠짐없이 나타났다.


3년 전, 쌍둥이를 유산하고 죽을 것 같은 심정으로 출근했던 날들이었다. 시험관 7차에서 처음으로 임신이 되었는데, 생각보다 일찍 아기들을 보내주어야만 했던..., 삶의 이유가 희미해져 가는 날들이었다.




출근하면 어김없이 영상편지가 도착해 있었다.

오후에는 비밀 쪽지 이메일이 한 번 더 와 있었다.


그렇게 남편은 하루에 두 번 내 이메일함에 나타났다. 목적은 단 하나. 나를 살리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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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비밀쪽지가 왔어요' 이메일의 내용은 이러하다.




오늘의 비밀 쪽지는 어디에 있을까요?

오늘은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240쪽을 열어 보세요 ㅎㅎㅎ

우리 내일 신나게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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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너무 쓰고 싶어서 결국 썼어요!!

앞으로 여유 있을 때만 쓸 테니 걱정 말아요 ㅎㅎㅎ

비밀 쪽지는 '당신이 옳다' 106페이지예요!

내일 우리 실컷 놀자~! 사랑해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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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비밀 쪽지는

바로 즉시 기분을 바꿔드립니다 98페이지에 있어요!!!

애기가 넘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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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기야!

오늘의 비밀 쪽지는 메시지 성경 사도행전 13장에 있어요 ㅎㅎ

우리 보리가 올 때까지 함께 말씀을 읽고 기도하자!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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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기야♡

오늘은 책 읽지 말고 쉬라고 책상 달력 속에 숨겨놨어요 ㅎㅎ

푹 쉬고 잘 먹고 잘 놀고 있어요♡

사랑해♡♡




퇴근 후 일상은 그의 비밀쪽지를 찾는 일이었다.

남편이 책 속에 숨겨둔 쪽지를 읽고, 책을 펼친 김에 쪽지가 들어있던 책도 함께 읽었다. 비밀쪽지 때문인지 책에 담긴 내용에도 온기가 스며있었다. 죽고 싶지만 죽을 수 없는 날들이었다.


나는 이런 남자와 이혼하는 법을 모른다. 설령 그가 10년째 백수라고 할지라도. 그는 아내를 살릴 수만 있다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남자다. 지금은 잠시 숨을 고르고 있을 뿐이다.




이슬아 작가는 메일함에 나타난 그와 결혼했다.

나는 메일함에 나타난 그와 결혼을 지속한다.

팔자 고친 것보다 더한 선물을 받았다.


나는 내 생명의 은인과 산다.


그리고 지금은 내가 그의 은인이 되어줄 차례다.


SE-ad0784d6-f809-481a-8b91-7318d9daf930.jpg 그의 비밀쪽지는 내 보물쪽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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