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경제력 없음은 이혼 사유가 아니다
남편이 돈을 못 벌면 이혼 사유가 아니라 아내가 돈 벌 사유다
국민 언니, 김미경 강사의 말이다.
나는 이 말을 10년째 붙들고 있다.
어느 날은 억지로 붙들고 있기도 하다가, 어느 날은 끄덕이며 붙드는 날도 있다. 울면서 붙들기도 한 날도 분명히 있었다. 아니 많았다. 그리고 10년쯤 되니 눈이 맑아진 것처럼, 남편 덕분에 내가 얼마나 해낸 것들이 많은지 보이기 시작했다.
직장을 다니며 힘든 시기가 있었다. 14년 동안 세 차례 정도 있었다. 그만두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지만, 나는 세대주이자 가장이었다.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었다. 자주 생각한다. 그 옛날 남자들의 무거운 어깨에 대해서. 죽을 듯이 힘들어 가슴에 품고 다니지만 절대 디밀 수 없는 그것에 대해서. 먹여 살릴 처자식이 있는 무게에 대해서.
남편 덕분에 유지할 수 있었다. 계속하다 보니 좋아졌다. 더 잘하고 싶어졌다. 그만두지 않아 다행이었다. 때로는 사표를 던지는 용기보다 꾸역꾸역 다니는 인내가 빛을 발할 때가 있었다.
혼자 자취할 때는 월급을 월세와 옷값, 택시비로 탕진했다. 결혼 후 남편이 퇴직하고 나는 미니멀라이프를 배웠다. 외벌이로서 궁핍했지만 결코 궁핍하지 않은 태도는 미니멀라이프에서 나왔다.
쌍둥이를 낳은 지금도 차 없는 뚜벅이로 살고 있다. 우리의 삶에서 비본질적인 것들 덜어내고 본질만 남기는 연습을 남편 덕분에 할 수 있었다.
내 안에 불 같이 일었던 화는 '남편 덕 좀 보자'는 마음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알았다. 적어도 손해 보고 싶지 않은 마음이 원인이었다. 결혼의 본질을 덕보는 걸로 오해했으니, 그렇지 않을 경우 이혼을 생각할 수밖에.
아내에게 덕 보게 해주고 싶었던 그의 마음만 알면 되었다.
나는 더 이상 그로 인해 덕 보려 하지 않는다. 그는 남편의 자리로 나에게 온 것이 아닌 '그 사람' 자체로 나에게 왔다. 나는 남편이 필요한 게 아니라 그가 필요할 뿐이다.
결혼하고 남편이 내 자취방에 들어와 살았다. 우리의 신혼집은 7평 원룸이었다. 1년 조금 안 돼서 전셋집을 구했는데, 남편 퇴사 후에는 되려 빚을 내서 작은 집을 샀다.
당시에 전세가 많이 없었을뿐더러, 그는 당분간 벌이가 없을 테니 2년 후 올려줄 전세금 마련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가파르게 전세금이 올라가던 시절이었다) 자가는 그가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에 앞서 '안정감'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10년째 백수인 거 보면)
내 월급으로 미니멀하게 살면서 천천히 대출 상환과 함께 저축을 이어갔다. 10년간 외벌이여도 저축을 쉬었던 적은 없다. 나는 그렇게 단단해졌다.
어느 친구의 연락, '나 독일가. 남편 주재원으로'
다른 친구의 소식, '오빠가 미국 가게 돼서 같이 가'
해외 살이의 꿈이 있었던 나는 남편 원망을 참 많이도 했다. (그런다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러다 한 결심, 내 힘으로 가야겠다.
공문서 뒤적뒤적... 일본어를 2년간 공부해서 국비유학생 자격으로 남편을 데리고 갔다. 일본 정부로부터 1년 6개월간 생활비 받아 가며 누린 해외 살이는 지금도 소중히 추억하는 우리의 제2의 신혼여행이 되었다.
남편에게 퇴사를 권한 것은 남편 건강 때문이었다. 결혼한 지 3년이 넘도록 아이가 생기지 않았고, 평생 아프지 않던 그는 수면 부족과 고된 업무 강도로 여기저기 고장 나기 시작했다.
그는 퇴사 후 첫 몇 개월 요양(=뒹굴뒹굴) 하더니 의료비가 0에 수렴할 만큼 몸과 마음이 건강해졌다.
한편, 양파 한 번 썰어본 적 없던 남편에게 살림을 가르쳤는데, 혼자 자기만의 레시피북을 만들고, 지금은 마음만 먹으면 한상 뚝딱 차리는 실력가가 되었다. (마음먹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남편 퇴사 후에 함께 요가를 다녔다. (그 요가 수업에 남편 혼자 남자였다)
요가원까지 가는 길에 수다 떨고, 요가하다 눈 맞으면 실실 웃고, 돌아오는 오는 길에 피자집에 들러 피자를 먹었던 여유 만만한 시절을 우리는 후회 없이 누렸다.
부부는 허리 건강을 되찾았고 평생 함께 할 취미가 생겼다. 남편 퇴사가 아니었으면 우리는 서로의 요가하는 어처구니없는 '태'를 못 보고 눈을 감았을 것이다.
처음 남편에게 퇴사를 권할 때만 해도 그의 백수 기간이 이렇게 길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길어야 2~3년 정도를 예상했는데, 만약 10년이라고 누군가 귀띔만 해줬더라면, 1년 차부터 '씩씩한 여성 10년 플랜'을 가동할 걸 그랬다.
지금은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누구(특히 가족) 핑계 대지 않고 무작정 시도해 본다. '남편이 OO만 한다면...' 이 생각으로 밀어뒀던 것들을 다 해보고 있다.
가장으로 산다는 것, 특히 여성 가장으로 산다는 것이 쉽진 않지만, 나라는 사람 역시 꽤 단단한 사람이란 걸
점점 알아가는 10년의 시간이 귀하다.
나는 걱정이 참 많고 나약한 사람이었다. 눈물도 많고 두려움도 많았다. '도를 아십니까'에서 1번으로 접근당하는 유약한 인상을 지녔는데, 여러 시련을 거치면서 조금은 딴딴해지고 질겨졌다.
특히 정신줄 면에서 자신이 없었다. 잘 무너졌고,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마음이 힘들어 A부터 Z까지 계획을 세워야 마음이 편한 사람이었다.
남편의 벌이 없는 10년이 내게 가르쳐준 것이 있다면, '나는 어디서든 살 수 있고, 어떻게든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현재 두 돌 안 되는 쌍둥이를 키우며, 공부하는 남편을 부양하는 이 삶도 잘 해내고 있다. (쌍둥이는 숨만 붙여놓아도 성공인 걸로)
나와 남편이 함께 만든 이런 느낌의 가족이 나는 참 좋다.
세상 쭈구리여도 세상에 내 편이 있다는 느낌.
나라는 사람 자체로 사랑받는다는 느낌.
사람은 자신을 진심으로 믿어주는 단 한 사람만 있으면 자살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나는 그에게 그 단 한 사람이 되어 주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며 산다. (비록 잘 되지 않는 날도 있을지라도 사명임에는 틀림없다)
'남편의 경제력은 이혼 사유가 아니다'는 김미경 강사의 말은 정말 맞았다.
그와 이혼했으면 난 위 10가지 중 단 한 가지도 이뤄내지 못했을 것이다. 남편 덕분에 나라는 사람을 더 알게 됐고, 세상과 더 치열하게 씨름했고, 그를 더 사랑하게 되었다.
그가 돈을 못 벌어 다행이다.
나는 그에게 빚진 마음으로 산다.
(빚 갚아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