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대는 결혼 유지에 도움이 될까
남편은 첫 직장을 3년도 안 되어 퇴사했다.
사실 그의 퇴사는 아내인 나의 염원이었다.
젊고 건강하던 남자는 몸과 마음이 아파갔고,
갓 결혼한 남녀에게는 신혼이랄 것이 없었다.
그가 회사에 그만둔다고 했던 날,
그의 직장 동료가 버선발로 뛰쳐나와 이런 말을 했단다.
'OO 씨, 지금 이러는 거 아내가 알아요?!'
평소 친분이 없던 사람이었다는데,
아내인 나의 마음까지 헤아려준 그녀의 말이 10년이 지나도록 잊히지 않는다.
혹자는 내가 능력 없는 남자와 결혼했다고 할지 모르겠다.
대한민국의 대다수 남자들이 다들 그렇게 사는데 엄살 피우는 남자를 만났다고 할지 모르겠다.
어쩌면 누군가는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남편에게 퇴사를 권하다니,
그만두겠다는 사람 말려도 부족할 마당에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했냐고 할지 모르겠다.
잠시 그런 무수한 말들에 대해 반론을 해보자면,
첫째, 능력 없는 남자와 결혼했다는 말에 대해 나는 할 말이 있다.
내가 결혼한 남자는 스카이 상경을 나왔다.
독서를 즐기며 인문학에 대한 지식이 해박한 사람이다.
10년 동안 일이 없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할 만큼 유망주였다.
둘째, 엄살 피우는 남자를 만났다는 말에 대해 역시 나는 할 말이 있다.
맞다. 엄살일지도 모른다.
누구나 겪는 직장살이의 고단함을 유난스럽게 느끼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다만 아내로서 그것을 엄살로 치부하고 싶지는 않았다.
엄살일 경우보다 만일 엄살이 아닐 경우,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는 실제로 '과로사'가 존재한다.
엄살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셋째,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퇴사를 권한 사람이 잘못이라는 말에 대해서도 나는 여전히 할 말이 있다.
입장 바꿔 생각해 보면 되는 일이다.
내가 그런 (사람을 쥐어짜서 말려버리는) 회사에 다닌다면 남편도 분명히 나에게 그만두라고 했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아낄 뿐이다.
나는 다만 그를 믿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간판을 믿었던 것 같다.
내가 그의 능력을 알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었다.
우리는 대학 생활 내내 연애를 했고, 그의 입사와 동시에 결혼을 했다.
우리가 자랄 무렵 스카이는 대단한 것이었다.
모두가 명문대를 꿈꿨고, 자녀를 명문대에 보내기 위해 부모는 자신의 몸과 돈을 갈아 넣었다.
아들딸의 학원비, 과외비를 벌기 위해서라면 허드렛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거의 모든 사람이 온 생애를 바칠 만큼 값진 것이라고 믿었다.
'스카이에 갈 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수 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스카이 나온 남자를 10년이나 부양하게 될 줄은 몰랐다.
대학은 아무것도 담보하지 못한다는 것을 그도 나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사회는 급속도로 변했지만, 온몸에 스며든 사회가 주입한 낡은 사고방식을 빼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스카이는 힘이 없었다.
적어도 남편에겐 그랬다.
두 돌 안 된 남매 쌍둥이를 키우며 교육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우리가 어렸을 적, 진리라고 믿었던 몇몇의 것들이 얼마나 허상이었는지를.
영혼을 팔아서라도 가고 싶었던 명문대가
한 사람의 결혼 생활을 지켜주는 데 전혀 쓸모가 없다는 것을.
어쩌면 그건 그저 간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한 사람이 '온전'해지는 데는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간판은 간판일 뿐이다.
명문대가 결혼을 지켜주지 않는다.
어쩌면 결혼 유지가 더 어려워질 수도 있다.
(결혼 유지에 관한 한)
명문대를 믿지 말자.
단, 한 번 믿었으면 끝까지 믿자.
명문대 말고 '내 사람'을,
허상 속에서라도 피어난 우리의 '진짜 사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