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 러브 코딩 48화 - 폭락
밝은 표정의 민수는 모니터를 바라보며 열심히 키보드를 치고 있다.
서부장이 영길을 불러서 뭐라 말하자 영길이 다시 민수를 부른다. 키보드를 바쁘게 치던 민수가 서부장 자리로 간다.
“두 사람 좀 앉아봐.”
민수와 영길이 서부장 옆자리의 원형 탁자에 나란히 앉는다.
“요즈음 유행하는 CRM이라고 들어봤지?”
“예.”
“Customer Relation Management, 고객관계관리, 쉽게 말해서 고객정보관리시스템이지,”
서부장의 말을 영길은 알아듣는듯 고개를 끄덕이지만 민수는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다.
“금융형 보험상품이 많이 출시되다 보니, 이제 여러 개의 보험 계약을 보유한 사람이 많아지고 있어, 계약 건수별로 관리하는 게 아니고 이제 고객별로 계약정보를 관리할 필요가 있어,”
“예, 그렇습니다.”
영길이 대답한다. 민수는 그 둘의 말을 조용히 듣고만 있다.
“보험서비스팀이 고객 정보하고 계약 원장을 관리하고 있잖아, 그러니까 CRM은 보험서비스팀이 맡아야 할 것 같아. 그렇게 생각 안 해?”
“예,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민수씨가 이 일을 맡아서 하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백팀장 생각은 어때?”
“계약 변경 처리업무는 정인주씨가 맡고 있고, 재보험과 정보계 쪽으로 이민수씨가 분담하고 있습니다.”
“잘됐네, 저번에 계약정보 조회 화면을 만들었는데 참신하더구먼.”
“현업 쪽에서 반응이 좋습니다.”
“그러니 이수현 씨가 지금 있는 시스템을 가지고 한번 잘해봐.”
“예.”
“너무 거창하게 하는 게 아니니까, 부담 가지지 말고. 현재 시스템을 개선시키는 방향으로 생각해 봐.”
서부장이 말을 마치자 민수와 영길이 자리로 돌아온다.
민수는 모니터를 바라본다. 민수는 머리를 깍지 낀 손으로 감싸며 몸을 뒤로 젖힌 채 모니터를 바라보며 골똘히 생각한다. 그리고 때로는 테이블에 손가락으로 책상을 툭툭 치기도 한다.
옆자리 명선이 민수의 그런 모습 쳐다보며 묻는다.
“뭐 잘 안돼?”
“막막해서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전처럼 꿈을 꿔봐, 혹시 알아? 꿈에서 또 가르쳐 줄지.”
그 말을 들은 민수가 피식하고 웃는다.
“민수씨, 커피 한잔 어때?”
명선의 말에 민수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민수는 바지 주머니에서 동전을 빼내 자판기 투입구에 넣으려 한다. 그것을 본 명선이 민수의 손을 막으며, 자신이 들고 있던 동전을 동전 투입구에 넣는다.
“내가 살게”
민수는 동전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민망한 듯 웃는다.
“자기가 먼저 눌러.”
민수가 먼저 커피를 뽑는다. 그리고 명선이 커피를 뽑기 위해 상체를 숙이자 민수는 명선의 귀에 걸린 귀걸이가 눈에 띈다.
“어, 귀걸이가 나무로 만든 거네요, 홍대리님 분위기와 잘 어울리시는 것 같아요.”
민수의 말에 피식 웃으며 말한다.
“결혼하고 나면 귀걸이도 소용없어, 봐주는 사람도 없거든.”
“그래도 남편분이 봐주시잖아요?”
“연애할 때뿐이야.”
민수는 의아한 듯 묻는다.
“이해가 안 되는데요.”
“연애하고 결혼하고는 달라?”
“그래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결혼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눈치 빠른 명선이 넌지시 넘겨짚는다.
“뭐, 결혼할 사람이라도 생겼어?”
부정하지 않고 그냥 웃기만 하는 민수를 보고 명선은 촉을 세운다.
“설마 유학 간다는 그 친구?”
“예, 며칠 전에 도장 찍었어요.”
“뭐, 도장을 찍었다고? 야~ 민수씨 그렇게 안 봤는데.”
명선은 민수를 힐난하는 눈빛으로 보면서 웃는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며칠 전에 그 친구 입사서류에 보호자로 내가 도장 찍어 줬어요.”
“아, 난 또….”
웃으며 말하던 명선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말한다.
“아, 그럼, 그날? 자기가 도장 가지러 사무실에 잠깐 들른 그날?”
“예.”
“그럼, 유학을 포기하는 거야?”
“예, 포기하고 취직하겠대요.”
“자기를 보호자로 했다면, 이거는 결혼하자는 거네, 야, 축하해, 좋겠다.”
민수가 커피잔을 들고 진지하게 말한다.
“좋은 것은 아니고, 그냥 얼떨떨해요, 10년을 친구로 지내다가 결혼할 사람으로 보려니 내가 좀 어색해져요.”
명선은 예전의 아마득한 연애 기억을 떠올리며 민수 말에 동의한다.
“그럴 수 있겠다.”
“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전화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전화하려면 뭔가 어색하고, 가슴도 떨리고 그래요.”
“자기, 기분이 묘하겠다. 그런데 여자들은 더 민감해져, 한 사람에게 묶이게 되는 거잖아.”
“서로에게 대한 묵직한 의무감? 뭐 그런 거 아닌가요?”
“맞아, 민수씨가 말하는 것 들어보니 그렇네, 나도 그때 그런 기분이었어.”
명선이 민수의 말을 들으며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영길이 민수를 부르자 민수는 의자를 끌고 영길 자리로 다가가서 앉는다.
“민수씨, 부장님이 말한 거 생각해 봤어?”
“생각해 봤는데,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그럴 거야, 나도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
민수는 영길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우선 현업 담당자하고 이야기를 좀 해봐. 고객 정보 관련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알아보면 감을 잡을 수 있지 않겠어?”
“고객서비스부 누구하고 이야기하면 될까요?”
“정동훈씨하고 이야기하면 되지 않을까?”
“예, 만나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이번 일에 대해 설명하고, 그쪽 부서의 생각을 좀 들어보라고.”
민수는 영길에게 대답하고 자리로 돌아온다.
민수는 전화번호를 확인한 후 고객서비스부 전화를 건다.
“예, 고객서비스부 정동훈입니다.”
“안녕하세요, 정보시스템실 이민수입니다.”
“예, 안녕하세요.”
“업무 협의를 좀 드리려고 전화를 드렸어요.”
동훈은 방어하듯 움츠러들며 묻는다.
“어떤 업무 때문인가요?”
“예, 고객 정보 관리시스템과 개발과 관련하여 좀 여쭤보고 싶어서요.”
동훈은 난감한 듯 머뭇거리다가 말한다.
“글쎄요, 그것에 대해 특별히 생각한 게 없어서….”
“한번 생각해 보시고, 언제 한번 올라오셔서 이야기하시죠.”
“에, 알겠습니다.”
“예, 수고하세요.”
민수는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고객서비스부에도 기대할 것이 없는 민수로서는 어떻게 시스템을 개발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이 깊어진다.
“맨땅에 헤딩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민수는 혼잣말하며 모니터를 바라본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민수는 한 손으로 키보드를 툭툭 치며 생각에 잠겨있다. 전화가 울린다.
“정보시스템실 보험서비스팀 이….”
민수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재희가 다급하게 말한다.
“민수야, 나야, 재희.”
의자에 편하게 앉아 있던 민수가 몸을 곧추 세우며 말한다.
“응, 왜?”
“기쁜 소식을 알려주려고.”
“뭔데?”
재희가 흥분한 목소리로 빠르게 말한다.
“나, 프린스턴대학에서 어드미션이 왔어.”
그 말을 들은 민수가 잠시 머뭇거린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한다.
“아, 축하한다.”
민수에게 이 사실을 어떻게 말할까 고민하다가 전화한 재희.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하다가 결국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미안해.”
민수는 여전히 마음을 속이며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한다.
“아냐, 정말 축하해, 정말 잘됐다.”
“너가 섭섭해하는 거 알아. 그렇게 말 안 해도 돼, 정말 미안해.”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듯이 말을 잇는 민수.
“미안하긴, 오늘 축하주 한잔할까?”
“오늘은 파주에 부모님 만나러 가야 해. 이 소식 전했더니, 내려오래.”
“갔다가, 올라오면 전화해.”
“응, 알았어.”
민수와 재희가 한참 동안 수화기를 들고 있다. 그리고 재희가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미안해.”
“괜찮아. 연락해.”
민수는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그제야 가슴 한쪽이 묵직해 오는 것을 느끼는 민수는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는다.
민수는 아무런 표정 없이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다.
“민수씨.”
민수는 낮은 목소리로 부르는 인주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인주는 민수와 눈을 맞춘 뒤 고개를 옆으로 틀면서 나가자는 신호를 보낸다. 그것을 본 민수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민수는 PC를 끄고 테이블을 정리한 후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뒤쪽 줄의 박재현을 낮은 소리로 부른다.
“재현씨.”
재현이 민수를 쳐다보자 민수는 고개를 옆으로 젖히면서 나가자는 신호를 보낸다. 재현도 알았다는 신호를 보내며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PC를 끈다.
인주와 민수가 먼저 사무실을 나선다.
인주, 민수, 재현이 호프집 테이블에 앉아서 생맥주 한잔씩을 앞에 두고 있다.
“민수씨는 어때? 민수씨도 종가가 떨어졌어?”
인주의 말에 민수가 심드렁하게 대답한다.
“모르겠어요, 오늘 신경 쓸 틈이 없었어요.”
“오늘 기분이 안 좋아 보이던데….”
인주의 말에 민수는 그냥 씁쓸하게 웃는다.
“오늘 점심시간에 주식객장에 들렀는데 그냥 주식전광판이 새파래. 오늘은 주가지수가 많이 떨어졌어.”
“제약주도 많이 떨어졌나요?”
“아마도… 오늘은 폭락장세라 모든 종목이 다 떨어졌어. 오전에 팔까 하고 고민했는데, 오늘도 운이 없네.”
민수도 힘없이 말한다.
“저도 오늘 운이 안 좋은 날입니다.”
주식에 대해 입을 닫고 있는 재현에게 인주가 묻는다.
“재현씨는 주식 안 해?”
“아버지가 주식 절대로 하지 말라고 하셔서 저는 주식 안 합니다.”
“그럴 거야, 신문에 주식 실패로 투신자살하는 사건이 심심찮게 나오니… 목숨 걸고 주식에 투자하는 기분이야.”
“아버님이 현명하시네, 주식하게 되면 대한민국 고민 다 안고 사는 거야.”
민수의 말에 인주도 적극 동조하며 말한다.
“대한민국 고민뿐만 아니라, 온 세계 고민을 다 안고 살지… 미국이 재채기 한 번에도 주가가 팍팍 떨어지니….”
민수가 원망스럽다는 듯이 말한다.
“나쁜 놈의 미국!”
인주가 생맥주잔을 들면서 소리친다.
“먹고 죽자!”
민수도 같이 소리친다.
“그냥 죽자!”
그러면서 셋은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켠다.
아파트 계단 밟는 발자국 소리가 오늘은 유난히 크게 들린다. 아파트 문의 열쇠 구멍을 못 찾아 아파트 철제문에 열쇠 부딪히는 소리가 ‘뚜거럭’ 거리며 들린다. 이윽고 문이 열린다.
술을 마셔 눈이 풀어진 민수가 집으로 들어선다. 어머니가 안방에서 나오면서 민수의 모습을 보며 잔소리한다.
“하이구, 또 술이 떡이 됐네. 떡이 됐어.”
민수는 말없이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