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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프지만 너는 눈부시다

정동의 소통을 배우며

by 리좀

"정동은 개인적인 감정이 아니라, 영향을 주고받는 능력이다. 이는 신체의 경험 상태가 다른 상태로 전이될 때 발생하는 비개인적 강도이며, 신체의 활동 능력의 증감과 관련된다." 들뢰즈, 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 中에서


한 명이 들어갔다가 두 명이 되어 나오는 신비의 산부인과는 계절의 변화와도 맞물려 있었다. 평소 추위를 잘 타던 만삭의 산모는 다시없을 생애 가장 덥고 오랜 늦여름을 겪었다. 그런데 퇴원할 무렵에는 갑자기 계절이 바뀌어서 낙엽이 흩날리는 가을이 되어 있었다. 보석이를 품에 꼭 안은 채 택시를 타고 돌아오던 길가에는 스산하고 생경한 가을 풍경이 펼쳐졌다. 마치 커다란 변화를 일으키는 미지의 터널을 지나 전혀 다른 세계로 접어든 듯한 느낌이었다. 익숙한 풍경이 그토록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던 건 눈 뜬 지 며칠 되지 않은 보석이가 품 안에 있었기 때문일 터였다. 보석이를 기점으로 해서 이전과는 다른 결의 세상이 펼쳐지고 있었고, 이제 막 그 세상에 발을 디딘 셈이었다. 아이를 낳으면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는 게 이런 것인가 싶었다. 마치 다중우주론처럼, 여러 갈래의 가능성으로 준비되어 있는 인생 노정 중에 하나의 경계를 넘어 확연히 다른 세계로 접어든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와 보석이와 함께 지낼 준비를 하면서 허둥대고 있는 사이, 미리 약속한 산후관리사가 방문했다. 사전에 아무리 많이 공부한다고 해도 육아야말로 이론을 무색하게 하는 경우가 많고, 실습과 실전이 동시에 진행되는 아슬아슬함의 연속이다. 누구나 육아 대상자로서의 경험은 갖고 있지만 아무도 그 기억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첫째 아이의 경우 생초보로서의 시행착오를 서로 감당해야 하는 처지가 된다. 산후관리사는 다년간의 경험으로 능숙하게 준비물을 챙기고, 주의 사항을 체크하면서 육아초보 엄마의 부담을 크게 덜어주었다. 느슨해진 관절들이 제자리를 찾고 면역력이 되살아 나기까지 여러 가지 도움을 받겠지만 무엇보다 몸과 함께 마음이 가장 약해져 있는 시기에, 누군가에게 온전한 돌봄을 받을 수 있다는 안정감이 큰 의미가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짧은 돌봄을 받으며 몸과 마음을 추스르면서, 앞으로 시작될 본격적인 돌봄을 위한 예열을 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보석이는 24시간 중에 모유와 분유를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 계속 잠을 잤다. 신생아는 잠을 자면서 성장과 발육을 하고, 정서 활동, 학습활동을 한다. 그래서 잠을 자니까 아무것도 듣지 못한다는 생각으로 신생아 앞에서 싸움을 하는 등 부정적인 소리를 낸다면 정서 발달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것은 조용한 클래식 음악이나 부드럽고 안정된 목소리를 들려주는 태교가 출산 후에도 계속 이어져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루 중에 얼마 안 되긴 해도 보석이가 눈을 뜨고 있는 시간이 되면 마치 멀리서 오랜만에 집을 찾아온 자식을 맞이하듯이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알아들을 수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이런저런 대화를 시도했다. 눈을 뜨고는 있지만 정작 눈에 보이는 것은 아직 색을 구분할 수 없는 흑백의 세상인 데다, 시력은 0.1도 안 돼서 가깝게 있는 엄마의 얼굴도 목소리로 겨우 구분할 수 있는 정도였을 것이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흐릿하나마 웃는 표정을 보여주고, 낼 수 있는 가장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려주려고 했다. 하지만 그 대화에는 언어가 낄 틈이 없었다.


보석이와 나는 언어로 하지 못하는 많은 소통을 했다. 보통은 엄마가 신생아에게 일방적으로 표현하고, 소통을 시도한다고 이해하지만 내가 느낀 건 정반대였다. 보석이는 분유의 양과 온도, 방 안의 기온과 습도뿐 아니라 엄마의 표정과 목소리 톤, 살갗을 쓰다듬는 촉감의 속도와 강도에 따라 다양하게 반응했다. 대부분은 자면서 짓는 미세한 표정과 숨소리, 깨면서 내는 울음소리로 표현했지만 각각의 상황마다 미세하게 달랐다. 기표적 기호계에 익숙해버린 상황에서 신생아의 다양하고 섬세한 비기표적 기호들을 읽어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서 잊어버린 모국어를 감각을 되살려 기억해 내는 일 같았다. 사람들은 언어나 문자를 통해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비교적 정확하게 전달한다고 생각하지만 인간 사이의 소통 중에 특히 감정은 언어와 문자로는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거나 잘못 전달될 때가 많다. 그리고, 이 시기에 어렵사리 서로에게 배운 비언어적 소통 방식에 대한 감각은 아이에게 일방적으로 언어를 가르치면서 쇠퇴하기도 한다.


엄마의 자궁 밖을 나와야 하는 난관을 준비하느라 물렁해진 머리모양을 잘 만들어 주기 위해 일정 간격을 두고 오른쪽, 왼쪽으로 번갈아가며 뉘어 재웠다. 보석이와 나란히 누워 잠을 청하다 보니 한 동안은 보석이의 정면을 보고, 또 한동안은 뒷모습을 보고 있어야 했다. 머리 크기가 전체 몸길이의 1/4에 해당하는 3등신의 뒷모습을 보고 잘 때가 많았다. 등을 보이고 자면서도 보석이는 엄마에게 많은 말을 하곤 했다. 머리와 똑같은 좁은 폭의 어깨를 하고 모로 누워서 새근거리는 숨을 쉬는 보석이가 걸어온 말 때문에 여러 번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곤 했다. 아직 제 머리 하나 가누지 못해 종일 누워 있어야 하는 좁은 어깨를 엄마에게 온전히 내맡긴 연약한 생명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아직 내 삶에 주어진 무게를 감당할 수 없어요. 삶은 무거운 거라는데 아직 내 몫의 삶을 짊어질 수 있는 어깨가 없어요. 나는 잠을 자면서 끊임없이 꿈을 꿔요. 가끔은 불안하고 무서운 꿈을 꿀 때도 있지만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면 안심이 돼요. 눈을 감고 있어도, 뒤돌아 있어도 엄마가 곁에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어요.’


보석이의 여리한 뒷모습은 아직은 더 조리가 필요한 아픈 엄마의 몸에게서 전에 없던 힘을 한 번에 끌어내 주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가진 모든 힘을 다 모아, 아니면 어떻게든 구해서라도 너를 꼭 지켜줄게. 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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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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