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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면초가 저체중아

두 개의 탄생

by 리좀

“개체화는 통일성으로의 회귀를 요구하는 종합이 아니라 존재가 자체와 더불어 단계를 통과해 가는 과정이다” 키스 안셀 피어슨의 『싹트는 생명』 中에서


의식을 잃는 일을 극도로 싫어해서 위내시경 검사도 비수면으로만 하던 나는 난생처음 마취에서 깨어나는 경험을 했다. 잠시 보류되었다가 갑자기 밀려오는 이전의 기억이 속사포 같이 쏟아져서 더더욱 정신을 가누기 힘들었다. 그리고, ‘아기는...’이라고 어렴풋이 첫마디를 떼었던 것 같다. 입원실 침상 주변에는 예상대로 아기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급히 소식을 듣고 어느새 와 계신 나의 엄마가 보였다. 엄마는 딸이 수술실에 들어가고 나서야 사위에게서 출산 소식을 들었다. 그것은 엄마와 나를 위한 사전 당부에 의한 것이었다. 평소 걱정이 많은 엄마의 비교적 담담해 보이는 표정에 갑작스러운 안도감이 밀려왔다. 큰 일을 겪고 황망해하는 엄마의 예의 그 표정이 아니었다. ‘괜찮은 거구나. 무사하구나!’라는 생각이 들 무렵 아기는 신생아실에 잘 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더 이상 엄마 뱃속에 있을 수 없다는 압박감에 예정일이 다가오자 섭식장애를 겪기 시작했던 것일까. 마지막 산전검사에서 출생 시 3.4kg 정도를 예상한다고 들었는데 정작 세상에 나왔을 때의 몸무게는 그보다 1kg이나 적은 2.43kg밖에 되지 않았다. 산모의 몸무게는 지속적으로 늘어 최종 13kg이 증가했는데 반해 보석이는 그런 뱃속에서 배를 곯고 있었다. 공식적인 저체중아였다. 보석이가 출생 직전에 급격하게 체중이 감소한 이유는 끝내 알 수 없었다. 영양분을 섭취하는데 문제가 있었던 건지, 출생 과정 중에 진력을 다 쓰느라 에너지 소모가 심해서였는지,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보석이가 이렇게 가벼울 줄 알았더라면 더 일찍 출산휴가를 내고, 팔자에 없는 공주놀이나 하면서 지냈을 텐데... 아니면 처음부터 수술을 준비했을 텐데... 결과론적인 이야기는 후회만 양산하므로 비슷한 일을 다시 만나지 않는 한 아무짝에 쓸모가 없다. 보석이가 보고 싶었지만 아직은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태아곤란증으로 곤욕을 겪은 보석이는 태변이 폐에 흡수된 상태로 엄마 뱃속에서 꺼내어져 신생아실 인큐베이터로 옮겨졌다. 산소 부족 현상이 더 오래 지속되었다면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가까스로 세상의 빛을 본 출생사진 속의 보석이는 머리둘레와 신장은 정상이지만 팔다리에 살이 별로 없는 야윈 모습이었다. TV 속에서 흔히 봤던 통통하면서, 때론 머리카락까지 까맣게 자라 있는 신생아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가느다란 팔다리와 삐쩍 말라있는 몸을 보니 10시간 넘게 고군분투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게다가 카메라 프레쉬에 인상을 쓰고 있는 표정을 보니 출생사진을 꼭 찍어야 했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감은 상태라도 태양광과 실내조명을 감당하기가 버거웠을 텐데 태어나자마자 맞닥뜨린 카메라 불빛은 또 얼마나 큰 쇼크였을까 싶었다.


제왕절개 수술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아서 제대로 걸을 수 없는 상태였지만 보석이를 꼭 보러 가야겠다는 나의 고집을 이기지 못하고 보석이 아빠가 어디선가 휠체어를 구해 왔다. 휠체어 바퀴가 흔들릴 때마다 느껴지는 살풋한 통증을 참으며 신생아실로 향했다. 목적지의 위치를 알지 못한 채 복도를 지나고 있는데 벌써부터 가슴이 뛰고 눈물샘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원활한 출산을 위해 골반과 인대와 자궁을 느슨하게 만드는 릴렉신호르몬이 분비되면, 206개의 관절과 인대가 모두 느슨해진다. 그런데 그 호르몬이 평생 다잡아 온 마음까지 함께 느슨하게 만들 줄은 미처 몰랐다. 머릿속으로는 분명히 평소와 다르지 않은 말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주변 사람의 사소한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무방비로 아프게 느껴져서 금세 눈물이 났다. 이상한 일이었다. 마치 후천성 감정면역 저하증이라도 걸린 것 같았다.


신생아실에 도착해서 철창 같은 통유리창 안쪽에 있는 아가들을 뚫어지게 관찰하는 사이, 간호사가 보석이를 인큐베이터에서 꺼내 안고 창 쪽으로 다가왔다. 태어난 지 만 하루 만에 성사된 보석이와의 첫 대면이었다. 뜨지 못한 눈, 영글지 않은 이목구비, 불그레한 피부, 성근 머리카락을 한 모습이 세상에서 가장 예뻐 보일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아직은 의존성이 매우 강하지만 독립된 개체가 된 보석이를 축하해야 하는데, 감격인지 감동인지 알 수 없는 느낌을 타고 눈물만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너로구나! 열 달간 그렇게나 엄마를 궁금하게 만들었던 아이가 바로 너로구나, 세상 밖으로 나오느라 말 못 할 고초를 겪은 나의 아이가 바로 너로구나!’ 보석이가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게 될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무겁게 마음에 담은 채,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다시 인큐베이터 안으로 들어가는 보석이를 끝까지 바라보다가 돌아왔다.


그때 내가 목격한 것은 한 점으로 시작하는 새로운 시간과 공간의 춤이었고 그것이 나의 목격으로 실재가 되는 장면이었다. 임신 중에 겪었던 경이로움이 가시화되는 첫 번째 발화였다. 입원실에는 비교적 노산인 산모의 출산을 축하하는 꽃바구니가 배달되었고, 방문하는 사람마다 고생했다는 말을 인사처럼 건넸지만 나는 그 모든 축하와 격려를 보석이에게 옮겨주고 싶었다. 어렵사리 개체화의 첫 번째 단계를 통과한 보석이가 겪었을 난산(難産)이 아닌, 난출(難出)에 대해서는 아무도 언급하지 않으니 엄마인 내가 그 몫을 대신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났을 때 엄마도 같이 태어났으니 하나의 탄생이 아닌 셈이다. 엄마의 탄생이었다. 우리의 겹탄생에 대한 축하가 최종의 축하가 되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많은 단계를 거쳐야 할 것이다. ‘같이 만들어갈 우리의 진정한 축하를 위해 태어나줘서 고마워. 그리고, 엄마로 태어나게 해 준 것도 고마워. 나의 보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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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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