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체 이전의 신체
“유기체가 아니라 신체에 의거할 때, 감각은 재현적인 것이 아니라 사실적인 것이 된다.” - 질 들뢰즈 「감각의 논리」 中에서 -
보석이가 몸속에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릴 때, 나는 그것을 복수성과 이질성을 알리는 움직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복수적라고 하기엔 아직 눈에 보이는 것이 없고, 이질적이라고 하기엔 거부감이나 충돌이 없기 때문이었다. 누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관계인가의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태아가 산모를 위해 존재하는지, 산모가 태아를 위해 존재하는 건지 대개는 구분이 잘 되지 않았다. 그보다 태아와 산모라는 것은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할 뿐 각각의 할 일을 잘 수행하고 있으니 불행한 사고만 일어나지만 않는다면 임시적이고 편의적인 구분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더 컸다. 길게 보면 태아와 산모는 곧 분리될 예정이니 유기적 관계를 형성한다고 볼 수도 없다.
보석이는 수정란에서 분화하여 자궁 밖으로의 조용한 탈주를 준비했다. 1차로 팔과 다리 같은 신체 기관과 내장기관의 분화를 일으키는데 이를 위해 어미의 자궁벽을 두껍게 하면서 활동공간을 서서히 확장해 나갔다. 이때, 양수와 함께 더욱 무거워진 배를 지탱하게 하려고 어미의 허벅지를 강화시켰다. 충분한 영양공급을 위해 어미의 소화력을 증진시키고 충분한 휴식을 위해 언제 어디서나 잠이 쏟아지게 만들었다. 늘 소화불량과 불면에 시달렸던 나는 임신기간만큼 속이 편하고 잠을 잘 잔 시기가 없었다. 스트레스에 대한 방어기제도 상당했다. 평소 같았으면 민감하게 반응할만한 상황이나 사건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도록 만들었다. 작은 일에 크게 기뻐하거나 들뜨지도 않았지만, 부정적인 일에도 크게 반응이 안되었다. 보석이는 물심양면으로 나를 조종했고, 나는 보석이의 안전한 자궁 속 생활과 탈주 과정을 위해 최적화되어 갔다.
뱃속에서 보석이의 눈코입과 팔다리는 엄밀히 말하면 아직 그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눈이 있으되 보지 못하고, 코가 있으나 냄새 맡지 못했으며 입이 있으되 아직 탯줄을 통해 영양을 공급받고 있었고, 폐가 있으나 폐호흡을 하고 있지 못했다. 팔로는 무언가를 잡거나 할 것이 없었고, 뭔가를 하는 기관이 있다면 가끔 엄마 배를 차는 발 정도가 다였다. 발은 걷기를 수행하는 기관이 아니라 엄마에게 자신의 활동성을 알리는 신호기관이었다. 말하자면 보석이의 신체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 대한 탐험과 연결의 공사현장 속에서 기능했다. 모든 기관이 잠재성만 가지고 있는, 강렬도 0의 그야말로 기관 없는 신체였다. 각 기관이 수행하는 기능이라는 고정적 질서에서 벗어난 상태, 무한한 생성을 잠재적으로 품고 있는 상태였다.
우리는 가끔 죽음 앞에 선 인간으로서 어린 시절로의 회귀를 순수함과 진리의 근원을 되찾아가는 과정으로 그리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어린아이 시절의 기억은 그다지 많지 않다. 어떤 느낌과 생각으로 살았는지 정말로 깡그리 잊어버리는 것이다. 기억하지 못하는 시절로 돌아갈 수 있어야 근원적인 자기를 회복할 수 있다니. 하지만 그것은 다만 기억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어린 시절보다 더 근원적인 회귀는 태아 시절이 아닐까 싶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태아의 잠재성은 아직 발화되지 않은 힘을 갖고 있는 가장 뚜렷한 실재이자 현실이다. 기억 속에서 송두리째 삭제당한 강렬한 한 시절은 탄생이라는 과정을 겪으면서 고유의 힘도 함께 잃게 된다. 잠재적 역량을 잃고 성장과 함께 서서히 유기체가 되는 신체는 죽음이라는 또 하나의 뚜렷한 실재와도 점점 거리를 두려 노력한다. 실재를 마주할 능력도 동시에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잊어버린 나의 탄생기를 지나, 또 하나의 간접적인 탄생을 마주할 용기는 죽음을 마주할 용기와도 맞닿아 있다. 수직적으로 들어맞지는 않지만, 비계층적으로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면서 태아기 잠재성의 역능을 유지하지 못한 채 죽음이라는 실재를 거부하게 되는 것이다.
종 보존의 유전자적 입장에서 보면 산모는 전적으로 태아를 위해 기능하는 측면에서 존재 의미를 가지고 있다. 수태를 위한 한 마리 짐승이 되어 가면서도, 그 어느 때보다도 가장 본래적인 생명체로 충실하게 존재하는 것에 큰 거부감이 들지 않는 특별한 경험이 계속 이어졌다. 보석이의 발길질은 대단한 노력을 기울인 것도 아닌데, 그저 뱃속에 품고 있는 것이 전부인데, 나의 몸속에서 생명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경이로움을 매 번 느끼게 했다. 많은 사람들이 하는 임신, 출산이라고 생각하면 일상적이고 흔한 과정으로만 여겨졌겠지만 보석이는 그 보다 ‘나는 조물주도 신도 아닌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라는 놀라움 쪽으로 나를 이끌었다. 나는 홀린 사람처럼 보석이가 이끄는 쪽으로 끌려갔다. 습관적인 복잡한 생각을 멈추기도 하면서 생명을 잘 품고 건사하기 위한 생명체로써의 감각이 주로 발달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짧고 강렬했던 입덧기간을 지나, 발이 퉁퉁 부어 퇴근길에 맞는 신발을 찾아다니던 시절을 건너, 부른 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을 부담스럽게 만들던 만삭의 시간을 통과해 갔다. 돌이켜보면 크고 작은 힘든 일이 더 많았을 텐데 왜 그런 일들이 힘든 기억이 아닌, 평면적이거나 오히려 아련한 기억으로 떠오르는 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얼굴 한 번 볼 수 없고, 손 한 번 만질 수 없었지만 보석이와 ‘함께’한다는 느낌이 그 어느 때보다 가장 강렬했던 시절, 탄생을 기다리는 초조함과 경이로 온 세상이 물들어 있던 시절의 감각이 지금도 생생하다. 너무나 생생해서 기억을 타고 흐르며 떠오른다는 느낌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 그때의 벅찬 심장박동과 숨소리와 가슴을 가득 메우는 기쁨이 실재하는 것 같다. 보석이는 늘 이렇게 회상이나 재현이라고 부를 수 없는 실재의 감각을 만들어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