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성을 위한 탈주의 길
“개체의 개체성은 단지 본성상 변화 없이는 분할되지 않는다는 강도량들의 속성에서 유래한다. 우리는 이 모든 깊이와 거리들로 이루어져 있고, 개봉되고 재-봉인되는 이 강도적 영혼들로 이루어져 있다” -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중에서 -
예정일은 단지 예정일일 뿐, 아무도 생명 분화의 시기를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예정된 일들이 예상대로 진행된다는 보장은 더더욱 없었다. 예정일을 일주일 정도 앞두고 출산휴가를 신청한 후 보석이를 기다리는 기간의 하루하루는 한가로움과 초조함, 기대와 두려움이 제대로 뒤섞인 상태였다. 보석이의 원활한 자궁 밖 탈주를 위해 하루에 두 번씩 13층 계단을 올라 다녔고, 진통이 시작되면 바로 병원으로 들고 튈 가방을 문 앞에 잘 준비해 두고 있었다. 그러나 예정일을 일주일이나 지나고서도 보석이는 세상 밖으로 나올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산모와는 달리 모든 것에 대해 경험이 제로 상태인 태아는 새로운 세상을 맞이할 기대나 흥분보다 상상할 수 없이 극심한 두려움이 더 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태아에게는 출생이 단지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존재 자체의 변화이다. 모든 사람이 겪는 첫 번째 존재 분화이자 그 과정을 겪지 않으면 생성되지 않는 존재의 발화점이다. 새로운 우주가 열리는 이 거대 사건을 맞이할 생리적 준비는 무르익었겠지만 심리적 준비는 다분히 산모에게만 해당되는 것인가 싶었다. 태아는 세상 밖으로 나올 마음의 준비를 마치는 것과 상관없이 이미 정해진 출생이라는 경로를 일방적으로 따라야만 하는 처지에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말한 것처럼 그저 세상으로 내던져지는 셈이었다. 아늑한 자궁에서 있다가 자신의 의도와 달리 세상으로 던져진다는 것에 대한 보석이의 반항은 예정일 9일째 도달했을 때 한계에 부딪혔던 것 같다. 예정일이 지나면 자궁 속 상황도 그다지 지속적으로 안전하지만은 않게 된다. 더 이상 자궁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환경의 압박이 다가오는 것이다.
예정일 9일을 넘긴 날 저녁, 미세한 산통으로 보석이가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느낌과 늦었지만 다행이라는 생각이 교차한 가운데 오랜 준비기간이 무색할 정도로 경황을 잃은 채 허겁지겁 병원으로 향했다. 커튼이 쳐져 있는 어둑한 분만실 안에서는 산모들의 진통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자정이 다 되어 가자, 언제 끝날지 기약 없는 진통의 시간 틈으로 간간이 졸음이 끼어들어왔다. 보석이의 망설임을 마냥 기다릴 수밖에 다른 대책이 없었다. 생성을 위한 탈주의 길이 이렇게도 험난할 줄 보석이는 전혀 몰랐을 것이다. 아직 권리상 태아 소속인 보석이는 자궁 밖은 위험하다는 직감과 더 이상 자궁 안에서 살 수 없다는 조건 사이에서 밤을 지새우며 다음 날까지 갈등했다.
진통의 강도는 더 세지고 간격도 좁아지고 있었지만 새벽이 다 되도록 자궁은 몇 센티 열리지 않았다. 세상으로 나오는 문을 여는 이는 누구일까. 보석이가 열지 않는 것인지, 내가 열어주지 않는 것인지 갑갑할 뿐이었다. 이러다 제힘으로 나오기를 포기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밤을 지새운 피로와 졸음을 이기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렇게 산통과 졸음 사이를 오가던 중 잠결에 흠칫 양수가 새는 느낌이 들었다. 응급상황이 발생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눈이 번쩍 뜨였다. 의료진이 황급히 커튼을 열어젖히며 태아의 심음 상태를 체크하는 기계를 확인했다. 태아의 맥박이 떨어지고 있다며 급히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갑자기 밀려오는 어지럼증으로 분만실 천장이 심하게 요동쳤다. 수술실로 옮겨지는 침상 위에서 마취과 선생님을 호출하라는 소리가 들렸고, 흔들거리는 침상의 바퀴보다 더 우왕좌왕하는 보석이 아빠가 보였다. 더 이상 보석이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태아에서 신생아로 변용하는 일은 인간이 겪어야 할 가장 아득하고 까마득한 여정일 것이다. 그 과정이 너무 힘들어서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한 생명이 만들어지는 ‘출생’이라 불리는 일이 흔하고 자연스러운 일로 포장되는 이유는 당사자의 입장이 생략된 채 2인칭, 3인칭의 시점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기 때문 아닐까. 죽음과 마찬가지로 모두가 겪거나 겪게 될 일이지만 아무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미지라는 문을 열고 나온 탄생과 다시 닫고 나갈 죽음의 문 사이에서 삶만이 유일하게 목격되지만, 목격자의 역할을 충실히 하며 제대로 증언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생생한 삶의 현장을 제대로 목격할 수 있는지, 현장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사건들을 이해할 수 있는지, 보고 듣고 이해한 것들을 있는 그대로 말할 용기가 있는지. ‘임신과 출산’이라는 ‘출생’에 대한 2인칭의 경험은 곧바로 이어질 삶에 대한 제1의 목격자로서 많은 질문들을 떠올리게 했다.
출생이라는 어마어마한 강도량을 온몸으로 끌어안으며 드디어 보석이가 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탄생을 경험한 산모의 몸이 다시 탄생을 공유하는 시간이기도 했지만 의식이 없는 채 이루어진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반복적이면서도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내는 일생일대의 순간을 기억할 수 없다니. 10시간여의 진통 끝에 보석이를 이런 식으로 맞이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이렇게라도 보석이를 만날 수 있는 것이 다행이기도 했다. 마취약 기운이 온몸에 퍼지면 분만실이 아닌 서늘한 수술실에 울릴 보석이의 세상을 향한 첫 울음소리를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보석이는 자신의 거처였던 자궁의 모체인 엄마와 강제 분리된 채 낯선 곳으로 옮겨질 것이다. ‘낯선 첫 호흡, 차가운 공기, 감은 눈으로 새어 들어오는 조명, 알 수 없는 소리까지 모두 이겨내고, 두려움과 외로움을 조금만 견디면 엄마가 깨어나 데리러 갈게. 네가 들으며 잠들던 심장소리와 목소리를 들려주러 바삐 갈게. 조금만 기다려. 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