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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라는 마주침

by 리좀 Mar 19. 2025

“진리는 어떤 대상과의 마주침에 의존하는데, 이 마주침은 우리에게 사유하도록 강요하고 참된 것을 찾도록 강요한다. … 사유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바로 기호이다. 기호는 우연한 마주침의 대상이다” - 질 들뢰즈 -

      

   ′앗, 지금 들이마신 공기 속에는 136가지의 냄새가 들어 있구나!′     


  아무렇게나 숫자를 말하고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냄새에 둔감하지 않은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명확히 다른 냄새들을 다양하게 맡을 수 있게 되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이것은 특별한 능력이라기보다 일종의 페널티에 가까웠다. 이제 보니 세상에는 생각보다 그다지 좋은 냄새로 가득 찬 것이 아니었다. 후각이 발달한 동물들은 어떻게 일상을 견딜까 잠시 생각하다가 숨을 들이마셔야 살 수 있기 때문에 후각이 금세 둔감해지기만을 바라면서 길을 나섰다. 그렇지만 모든 공간마다 비위를 거스르는 새로운 냄새들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한 냄새에 마비된 후각은 또 다른 냄새에 이어서 반응했다. 대수롭지 않았던 특정한 사람의 냄새가 유난히 역하기도 했다. 냄새로 실체를 파악할 수 있게 된 것처럼 지금 맡는 그 사람의 냄새가 마치 그 사람의 정체인 것 같아 다시 보게 되는 이상한 경험까지 했다. 그렇지만 냄새는 상호반응 하는 것이라 단지 나한테만 역할뿐이지 절대적으로 좋다 안 좋다를 판단할 수 없는 것인데... 단지 냄새 하나만으로 세상이 이렇게 달리 보일 수 있다니. 평소 침샘을 자극하던 냄새는 어느새 변절해서 역하게 다가왔고, 오히려 평소에 쳐다보지 않던 음식 냄새가 무난한 경우도 있었다. ‘숨을 쉬되 냄새를 맡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같은 엉뚱한 방책만 궁리하다가 하루를 다 흘려보낸 적도 있었다.      

 

 발달한 후각은 미각에도 영향을 끼치고 시각과도 연결되어 드러났다. 음식 사진을 보거나 떠올리기만 해도 후각과 미각이 반응하는 정도가 느껴졌다. 어쨌든 먹고살기 위해서 후각과 미각을 자극하지 않을 음식 장면을 한 장 한 장 슬라이드 사진 넘기듯 떠올려 보았다. 고르고 골라 겨우 통과된 음식은 평소에는 거들떠보지 않았던, 간이 세지도 않고 별다른 양념도 없는 무미건조한 음식 몇 개뿐... 그나마 통과된 음식이 있어서 다행이었지만 마치 태아가 산모에게 먹어도 좋을 음식을 지정해 주는 것 같았다. 자궁벽에서 조금씩 몸을 불려 가는 태아는 산모에게 미묘한 고통을 주면서 자신의 영향력을 늘여 갔다. ‘아직은 몸속 깊은 곳에서 작게 웅크리고 있지만 자신의 존재를 한시라도 잊으면 안 된다’고 신호하는 것 같았다. 보석이의 신호가 너무 강렬해서 나도 모르게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알았어. 공기가 좋지 않은 곳에는 되도록 가지 않을게. 자극이 많은 음식은 되도록 먹지 않을게. 그동안의 내 취향과 입맛은 잠시 접어둘 게. 우리는 지금 한 몸이니까.’        

  보석이는 한 사람을 인간이기 이전에 하나의 생명체라고 엄격하게 지적하며 태동했다. 진정한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며 살아온 노정을 다시 되돌려 놓으며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게 했다.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생명체인 것을 절실히 느껴야 한다고, 별 감흥 없이 습관처럼 숨 쉬고 먹고 마시는 일이 ‘생명체’에게 얼마나 중요하고 특별한 행위인지 각인시키는 것 같았다. 들이마시는 공기와 먹는 음식 속에 스며 있는 갖가지 분자들을 알고 있느냐고, 그것이 생명체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 본 적 있느냐고. 공기는 그저 산소만 들이마시면 그만이고, 음식은 그저 맛만 좋으면 그만인 것이 아니라고. 본래 생명체의 생존에 유리하게 발달된 감각이 둔감해지면서 자신도 모르게 엉뚱한 방향으로 호도되고 있는 게 아니냐고... 생전 처음 겪어 보는 입덧이라는 과정을 통해 문제제기하며 질문을 하고 있었다. 강하게 영향을 미치는 존재로부터 그동안 생각지 못했던 질문을 받을 때는 당황스럽거나 고통스러울 수 있다. 여기서 발생한 고통은 그저 없어지기만을 기다리며 참고 누그러뜨리는 것만이 다가 아닐 수 있다.       


  보석이를 품으며 생긴 입덧은 보석이와의 마주침에 의한, 일종의 기호와 같았다. 보석이는 생명으로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할 무렵, 끊임없이 신호를 보내면서 교신을 시도했다. 기호는 평화를 깨뜨린다는 점에서 폭력적일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폭력은 손상을 가하는 외부의 힘이라는 사전적 의미라기보다 ‘외압적’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외부의 영향이 없으면 자진해서 파란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마주침이다. 이 우연한 마주침은 예기치 않은 고통을 수반하며 사유로 가는 길을 연다. 마주침이라는 사건이 일어난다고 꼭 사유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주침이 사유의 필요조건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사유는 우리에게 진실을 찾아가도록 만든다. 진실은 쉽게 가려지고 오염되기 때문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찾기 힘들다. 보석이가 일으킨 사유는 진실을 찾아가는 구불구불한 노정과 같다. 보석이가 보내는 수많은 기호의 방출을 민감하고, 면밀하게 관찰하면서 다양한 해석을 시도할 것이다. 그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아마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랑은 기호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다양한 해석을 풍성하게 시도하고, 엮고, 다시 재조합하는 과정일 것이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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