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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 생명을 품다

믿을 수 없는 사진 한 장

by 리좀

“추상은 체험된 경험이다. 우리는 다만 추상을 살 수 있을 뿐이며, 아무도 추상 외에 어떤 것을 살아오지 않았다.” - 질 들뢰즈 -


생명은 사진 한 장으로 시작했다. 사진은 인기척이 없는 생명을 알아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흐릿한 초음파 사진으로 처음 접했을 때, 손톱만 한 크기의 돌기 같기도 한 것이 생명이라는 것을 쉽게 믿을 수 없었다. 미약하고 조그만 것이 필사적으로 자궁벽에 붙어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생명은 원하고, 의도한다고 만들어지는 것이라기보다 ‘주어지는 것’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탄생을 원하고 의도한 적 없지만 주어지고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부모의 의도가 강력해 보여서 생명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듯 생각되기도 하지만 절대적인 것은 결코 아니다. 누구도 생명 탄생의 결정권을 전적으로 일임받지 못하며, 원하고 의도한 바대로 될 것인지도 알지 못한다. 어찌 보면 부모란 생명에 대해서 약간의 결정권을 부여받은 대리인 같다.


‘아, 네가 나에게 왔구나!’


단말마의 외침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어떻게 생겼을지, 어떤 성격을 갖고 있을지, 성별은 어떻게 되는지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는 ‘생명’이라는 추상이 강하게 밀려왔다. 그것은 일종의 파도 같기도 하고 망치의 타격 같기도 한 커다란 울림이었다. 생명이 생명을 이처럼 강타할 때 누군가는 별 느낌이 없기도 하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도망하고 싶을 정도로 그 강도에 압도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비단 현실적인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나’라는 생명에 대해서도 불가해한 채로 또 다른 새로운 생명을 배태한다는 것이 미지(味知) 위에 미지를 겹으로 싸안는 것 같은 중층적인 미묘함으로 다가왔다.

알지 못하는 ‘너’를 두고 상상과 추측을 거듭하는 것보다 알지 못한 채로 있는 힘껏 내면화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것은 무조건적이었다. 누군가는 어떤 현상에 대해 이해해야만 공감할 수 있다고 하지만, 세상의 모든 일은 그런 논리적인 이치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이해는 뒤로 미뤄두고, 일어나는 현상 모두를 있는 그대로 껴안아야 할 때도 있다. 생명 안에 생명이 싹트면서 같이 밥 먹고 같이 잠자고 같이 걸어 다니는 것을 어떤 명료함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이해에 앞서 그런 일은 이미 벌어지고 있고, 앞으로 당분간 계속 진행될 것이며, 이후의 일을 확신할 수 없는 채로, 모든 현상과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결론을 남긴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고, 나 자신조차도 같은 경로를 거쳐 왔지만 그 모든 것을 다 무산시킬 만큼 이제까지의 모든 경험을 단번에 뛰어넘는 경이로움은 경외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너무 흔하게 생멸하기 때문에 생명의 경이로움을 간과하고 경외를 도외시한 사람을 벌하듯 그렇게 네가 왔다. 이제까지 세어온 숫자의 행렬을 멈추고 처음부터 다시 새어나가는 것 같았다. 1.5센티미터라는 생명의 싹은 이제야 生에 대해서 뭔가 알 것 같다는 오만에 일격을 가하며 육중한 성인의 몸과 마음을 뒤흔들었다. 잘 보이지도 않고 티도 안 날 만큼 작았지만 이제까지의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영향력을 발휘했다. 아직 생명이라고 하기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생명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잠재적인 너에 대한 경험은 앞으로 나를 관통하여 펼쳐지면서 추상으로 체험될 것임을 직감했다. 너는 잠재적이지만 극명하게 실재적이다.

사진이라는 시각-효과는 추상적 선이라는 사건이며 그것은 내가 마치 너를 보았다고 느끼게 하는 모든 긴장을 아우르고 있었다. 너라는 사건에 대한 직접적인 지각으로, 잠재적인 너는 그 이후부터 나에게 늘 작동하는 현실이 되었다. 일종의 섬광 같은 현실이자, 관계의 존재였다. 초음파 사진은 흑과 백으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곡선과 굴곡 사이의 빛은 모든 색들을 함입한 섬광으로 빛나고 있었다. 아직은 미동도 하지 않고 숨죽이며 존재하는 뱃속의 보석이는 자신과 관련한 사람들에게 새로운 변곡점이 되어 앞으로 다양한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이었다. 그 추상적 파장에 지레 압도당해서 많은 사람들은 생명이라는 사건을 애써 피해 간다. 그리고 그 파장 중에 가장 엄중한 것을 표현하자면 아마 ‘책임’이나 ‘희생’ 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둘 다 ‘생명을 대하는 생명’ 자체를 가리키고 있지는 못하다.

하늘에서 숨 쉬는 보석이 떨어졌고, 그 보석은 내다 팔거나, 버리거나, 누구한테 맡겨질 수 없으며(간혹 그런 일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보석을 부여받은 자는 그것을 더욱 잘 빛나게 하도록 애쓰는 일밖에 하지 못한다. 행여 보석이 상할까, 혹은 잘 빛나지 못하게 될까 무한으로 애태우면서 혼신을 다해 보석에 집중하는 마음을 책임이나 희생으로만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보석은 지속적으로 귀히 여김을 받지 않으면 때로 빛을 잃은 광석이 되기도 한다. 보석이 보석일 수 있는 이유는 귀히 여겨 소중히 다루어지기 때문이다.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보석을 보석으로 대할수록 보석은 온전히 제빛을 발한다.

지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조건이 붙은 선물을 받고서야 비로소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인가, 혹은 존재였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별 문제없어 보여서 당연하게 여겨지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게 되고, 어떤 문제로 왜곡을 겪게 된 부분이 있었다면 더 도드라져서 관련한 사유를 불러일으킨다. 자신이 부모를 비롯한 누군가에게 받은 마음 씀에 대해 가늠하기 시작하고, 고통이나 아픔이 있었다면 그것을 만들어 낸 미숙한 마음 씀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느 쪽이든 하늘에서 떨어진 그 선물은 누구든 자신을 투영할 수 있는 거울 앞에 세운다. 바로 자식이 거울이 되는 이유이다.

초음파 사진을 통해서 겨우 가늠할 수 있는 손톱만 한 작은 형체는 이미 그 자체로 새로운 세계, 새로운 우주의 시작점이다.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문 앞에서는 환희와 기대로 충만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때로 두렵거나 막막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너무 어리고 오래돼서 기억나지 않는 새 우주의 시작점을 제대로 체험하는 기회이다. 우주의 문은 그저 열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문을 여는 순간부터 만들어가는 것임을 직감할 수 있다. 그때까지 자신을 잘 구성해 온 사람은 문 앞에서 두려움이 덜할 것이다. 주어졌지만 주어지기만 한 노정이 아니었을 때 새로운 문을 여는 손이 덜 떨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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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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