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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자란 아이

이야기를 만드는 여행

by 리좀

“매끈한 공간(유목적 공간)은 소유의 공간이 아니라 변용태의 공간이다. 이것은 외연이나 측량의 공간이 아니라 강렬한 내포적 공간이다. 그것은 하나의 생성이다. 사유하는 것, 그것은 여행하는 것이다.”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천 개의 고원』 中에서

집 나가면 고생이라며 집을 가장 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여행지에서 고생을 사서해 본 사람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때마다 바리바리 짐을 싸서 집을 나선다. 한 번도 느껴보지 않은 낯선 땅, 낯선 공기, 낯선 풍경을 찾아서 시간과 비용과 노력을 들여 움직인다. 관광과 구분되는 여행은 일시적이나마 배치를 바꾸는 행위이다. 배치를 바꾸는 것은 나 이외의 환경을 바꾼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보다 바뀌어진 환경으로 영향받아 스스로 크고 작은 변화를 맞는 것을 의미한다. 관광은 여행지 안으로 들어가 그 속에서 머문다기보다 ‘구경하는 자’의 입장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대상과 나 사이에 물리적이고 심리적인 거리감을 좁히지 않는다. 여행지 속 사람들에게 관광객은 진정한 손님이라기보다 소비자, 구경꾼에 더 가깝다. 관광객의 몸은 여행지 안에 있어도 마음은 언제든지 출발지에 스프링을 묶어 둔 사람처럼 순식간에 되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관광지의 이채로움에 감탄할지언정 그곳에 마음을 두고 오지 않는다.


역마살이 살짝 있어서 그런지 나는 형편이 되는대로 여행을 자주 다녔다. 누가 가자고 해서, 여행 모임이 있어서 생기는 기회뿐 아니라 ‘혼여’의 상황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음이 특정 지역으로 먼저 떠나 있는 경우도 많았다. 그럴 때는 집에서보다 여행지에서 오히려 편안함을 느끼곤 했다. 그 편안함에는 낯선 곳에서 느끼는 일정 정도의 설렘이 항상 포함되어 있었다. 설렘과 편안함은 어찌 보면 상반된 감정일 텐데 둘이 공존할 때만 느끼는 미묘한 감정의 역치가 있었다. 살풋한 불안감 위에서 느끼는 자유로움은 안정된 것만을 추구하는 일상의 삶 속에서는 채워지지 않는 내면의 소리를 듣는 것과 같았다. 삶이라는 것이 본래 시작되는 순간부터 안정과는 거리가 먼 속성을 가지고 있는데도 불안을 끌어안을 용기가 잘 나지 않기 때문에 전혀 상반된 속성인 안정을 추구하며 그 속에 머무르려 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관찰자적 입장을 견지하는 관광객의 경우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나와 낯선 대상은 애초에 분리된 존재라는 일관된 입장의 관광과는 달리 내게 있어 여행은 항상 머릿속을 휘감고 있는 질문들의 실타래를 풀어 보려고 책 속을 헤매 다니는 마음과 비슷했다. 이해했다고 느끼는 순간 다시 생경해지는 것들과의 반복된 상호작용 같았다.


돌아보면 보석이와 보낸 시간 중에 절대적인 시간만 따지자면 집에서 같이 먹고 자면서 일상적으로 보낸 시간이 가장 많을 텐데, 정작은 길 위에서 함께한 시간이 훨씬 기억에 많이 남아 있다. 보석이와 함께 했던 그 많던 시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시간은 흘려보내는 것보다 힘들더라도 만들어가는 것이 실제로 내 것, 혹은 우리의 것이 되는 것 아닐까.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시간을 아까워하며 보석이와 나는 마음속에 깊이 남을 서로의 시간을 만들기 위해 함께 길을 나서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보석이의 초등학생 시절 봄, 가을 주말에는 날씨와 건강과 기타 다른 조건이 허락하는 한 빠짐없이 집이 아닌 길 위에 있었다. 후에 물어보니 저학년 시절의 여행은 더러 지명이나 시기 등을 잊어버리거나 헛갈려하기도 했지만 우리가 낯선 곳에서 함께 했다는 사실과 그 사실이 불러일으키는 다양한 감성은 명확하게 보석이 안에 남아 있었다. 여행지에서의 모든 움직임은 반복되는 일상에서와는 달리 더 풍부한 정동을 흐르게 하고 그 역동성의 힘으로 기억에 오래 남아 있는 것 같다. 각자 있는 것보다 함께 있는 것에, 함께 있는 것보다 함께 한 것에, 그중에서도 하늘과 땅, 공기, 바람, 나무, 꽃의 기운을 받으며 함께 한 것에 우리의 마음은 더 진하게 머물러 있었다.


계획 없이 무작정 떠나는 여행도 좋지만 여행의 연속성과 성취감, 교육적 효과까지 고려하여, 주말마다 팀을 짜서 인솔교사와 함께 역사체험을 하는 기존의 프로그램을 따라 하기도 했다. 한국사의 발자취를 따라 전국의 유적지, 기념관 등을 순서대로 방문해 보는 여행을 우리 가족이 직접 기획하고 실행했다. 구석기, 신석기,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학교 밖 유료 프로그램보다 더 세밀하게 계획해서 2년여의 기간에 걸쳐 순차적으로 진행했다. 여행을 가기 전에 관련 지식을 약간 공부해 가거나 현장에서 해설사 선생님의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역사 지식 학습이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크게 괘념하지 않았고, 다른 비정기적인 여행과 유연하게 병행했다. 그것은 마치 역사책에 나오는 시대의 순서를 따라간다는 피상적인 가이드라인을 설정해 놓고, 우리가 사는 땅을 가능한 한 골고루 밟아 보려 했던 한 시절의 이야기를 만드는 작업 같았다. 역사가 무수한 정사와 야사를 남기며 이야기를 이어 가고 있듯이, 우리 가족은 짧고 긴 많은 여행을 통해 각자의 마음속에 함께 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새겼다.


우리가 다녔던 그 길을 다 기억할 수는 없겠지만 길 위에서 함께 땀 흘리고 먹고 마시면서 나눈 것들이 지금의 우리를 생생하게 구성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발 딛는 곳에서 잠깐 동안만이라도 그곳에 쏟아지는 햇빛과 바람과 눈비와 하나 되어 스며들 수 있는, 유목민적 사유, 여행자의 사유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성하면서 고정된 개념이나 정체성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또한 학생, 엄마, 회사원‘이기 (being)’를 벗어나서 잠시라도 이방인, 방랑자, 탐험가 '되기(becoming)'를 실현하는 일이기도 하다. 흔하디 흔하다고 생각될 수 있지만 사실은 너무나 눈부시게 아름답고 소중한 것들과 어우러진, 엄연히 구분된다고 인식될 수 있지만 사실은 너무나 은은하고 깊게 연결되어 있는, ‘나’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모자란 ‘우리’가 켜켜이 쌓여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여행지에서 생긴 에피소드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그것에 대해 시시콜콜 이야기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공통의 체험, 연결의 울림은 보석이와 나의 몸마음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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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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