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밀함을 오래 유지하기 위한 거리두기
“서로에 대해서 가까워지기를 바라는 사랑의 의무는, 서로의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에 더 주목하여, 서로에 대해서 거리를 유지하도록 요구하는 존경의 의무에 비해 덜 엄격하다” 이마누엘 칸트 『윤리형이상학』 中에서
누군가에게 깊이 빠져 있으면 그 사람을 제대로 볼 수 없다. 너무 멀리 있어도 자세히 볼 수 없지만 너무 가까워도 잘 볼 수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니체의 말처럼 ‘본다’는 것은 항상 해석을 동반하기 때문에 무언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이 해석으로 인해 자신의 시각이 결코 객관적일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에 비로소 더 깊어질 수 있다. 같은 사건을 현장에서 동시에 목격했어도 그것을 본 사람의 숫자만큼의 해석이 만들어진다. 비슷할지언정 동일한 것은 없다. 세상에서 가장 주관적이고 편파적인 시선 중의 하나가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시선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내 자식은 객관적으로 봐서 어떠어떠해’라는 말처럼 의미 없는 말은 없어 보인다. 자식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 때는 자식이 아닌 경우 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말 자체가 모순적인 것처럼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처럼 여기게 되는 딜레마이기도 하다. 앞서도 말했듯이 누군가를 객관적으로 본다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기도 할뿐더러 그 대상이 자식일 경우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객관적으로 볼 수 없는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곁에 있는 시간이 많다는 이유로 부모는 자식을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한다고 생각한다. 학교에서 어떤 아이가 저지르는 비행을 그 아이의 부모만 빼고 다 아는 경우도 있고, 자식이 자신의 성격이나 가치관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전제가 너무 강한 나머지 ‘내 자식이 그럴 리 없다’는 단언을 쉽게 하기도 한다. 이러한 문제는 자식과 부모가 서로를 감추거나 속일 의도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서로의 시각이 객관적이기가 힘든 관계이기 때문에 비롯된다. 자식은 유전자를 물려준 윗 세대들의 혼합적 존재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형태의 화학적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기까지 오랜 시간을 소요하는 부모들도 많다. 나아가 자신을 꼭 닮은 자식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떤 부분(특히 아쉬운 부분)은 자신과 전혀 닮지 않은 존재이길 바라는 이중성을 보이기도 한다. 사랑과 기대와 소망이 너무 큰 나머지 거기에 미치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 염려, 자책, 채근 등이 동반되고 그것들이 서로 복잡다단하게 한데 뭉쳐 있다. 부모의 마음은 하해와 같이 넓기만 한 것이 아니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이리저리 갈팡질팡하기도 하고 천 갈래 만 갈래로 나뉘어 오락가락하기도 한다.
보석이가 심각한 외모 콤플렉스가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적이 있다. 예쁜 아이 대회에 나갈 정도는 아니어도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내 눈에는 보석이가 늘 예쁘기만 했다. 그건 엄마니까 그렇게 보이는 거라고 보석이가 대놓고 말할 때까지 보석이의 외모에 대한 내 생각에 전혀 의심이 없었다. 말수가 적고 생각이 복잡하고 남들 앞에 나서기 싫어하는 것 같은 성격에 대해서는 보석이와 일치된 의견을 갖고 있으면서도 외모에 대해서는 보고 싶은 대로 봐도 괜찮다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하고 있었던 듯하다. 자연스러운 우여곡절 끝에 외모 콤플렉스를 스스로 극복해 가는 보석이가 지금은 더 예뻐 보이니 이 부분에 대해서 나는 구제불능이라고 해도 반박할 수 없다. 다만 나의 편파적인 시각이 어떻게든 보석이에게 해가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혹여 후에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면 의식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되도록 많이 반영하도록 노력하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한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자신을 이해하는 것 못지않게 어렵다. 마음은 늘 수만 갈래로 뻗쳐 나가며 종잡을 수 없이 움직이다가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옴짝달싹 안 하고 늘러 붙어 있기도 한다. 마음을 가누기에 앞서 잘 살펴서 제대로 파악하기도 힘에 부칠 때가 많다. 또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방어기제를 발달시키는데 이는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일어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른 사람의 비난에 과하게 공격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하고, 온갖 이유를 붙여서 합리화시키기도, 하고 다른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하기도 하면서 갖가지 방법으로 자신을 방어한다. 자기 방어가 가장 우선적인 목적이기 때문에 그 목적을 위해 사용된 방법들에 대한 폐해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부차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자신과 타인에게 행하는 억압은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의식하지 못한 채로 고통을 당하기도 한다.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 시작되었던 무의식적 기제가 결국은 자신과 주변부와의 관계를 더 악화시켜 버린 채 깨닫지도 못하게 만든다. 자신은 물론 가까운 관계에서 너무 깊이 관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거리는 근접을 너머 밀접을 지나 투과에까지 이른다.
특정 유형의 심리 기제로 힘든 부분이 있다면 한 발 떨어져서 자신을 관찰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갈 힘을 길러야 하듯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관계 중 하나인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부모의 고통과 마음을 나눈다고 자신에게 담아서 평생 짐스럽게 살아가는 사람이 그 마음을 해결하지 못하고 자기 자식에게 대물림하는 경우도 있다. 마음을 담담하게 나누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복잡하게 얽혀버리는 것이다. 너무 뿌리 깊게 얽히면 나중에는 거리를 유지할 여지가 적어지고 힘들어지게 된다. 그래서 마음(자신이든 타인이든)을 헤아리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거리는 꼭 필요하다. 그 거리는 친밀감을 오래 유지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것 같다. 인생방향이 얽혀 버리고 감정이 얽혀버리고 사고방식까지 얽혀버려서 불화에 이르는 경우가 너무 많다. 때로 투과적, 혼동적 거리감은 몰이해만큼이나 이해가 부족할 수 있다. 자신의 장단점을 잘 파악하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면서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의 주변 사람들은 그 사람 때문에 고통받는 경우가 적을 것이다. 나에게 중요한 사람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 주는 게 좋을까를 고민하는 것이 스스로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숙고하는 문제와 동일선상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