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감옥에서 벗어나기
“우리는 나무나 뿌리라는 재현 모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낡아빠진 사유의 변주이다. 리좀은 사본이 아니라 지도이다. 지도는 그 자체로 리좀에 속한다. 지도는 열려있다. 지도는 모든 차원들 안에서 연결접속될 수 있다.”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천 개의 고원』 中에서
아이들은 대략 3에서 5세 정도에 이르면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긴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언어는 의사소통을 위한 도구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사고의 틀을 형성하기도 한다. 따라서 아이들은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의 언어 사용법을 보면서 사고하는 법을 배우는데, 자연스럽게 자신의 주변에서 가장 많이 언어를 쓰는 사람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을 것이다. 또한 그 사람이 자신에게 절대적인 존재라면 그의 언어는 의사소통이나 사고의 틀 형성 외에도 가치관 및 정서 구조에까지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을 만들어가는 과정 중에 있는 아이 앞에서, 양육자가 사용하는 언어의 힘이 얼마나 지대할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정도이다. 물론 이러한 언어는 말투, 목소리 톤, 표정, 목소리 크기 등 다양한 비언어적 기호와 함께 전달되기 때문에 오롯이 텍스트 자체의 문제만은 아니지만 언어 표현법에 따른 경향성에 따라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아이가 주로 부정적인 표현을 쓰는 사람을 자주 보면 부정적인 시각을 획득할 가능성이 크고, 긍정적인 표현법을 자주 쓰는 사람에게서는 긍정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세상을 조명하고 투과하는 렌즈로서의 언어는 어디를 어떻게 비추냐에 따라 세상에 대한 다른 상像을 볼 수 있게 한다. 아이가 만들어가는 언어의 렌즈는 양육자의 것을 닮아 가기도 하고 때로는 양육자의 것에 반사되기도 한다. 지각하지 못하는 편견과 선입견이 아이에게 그대로 전달되기도 하고 혹은 그러한 편견과 선입견에 대한 반감으로 반대의 사고가 생기기도 한다. 2녀 중 장녀로 태어난 나는 어렸을 때부터 존재하지도 않는 가상의 장남과 늘 경쟁하면서 피해의식을 느껴야 했다. 그 장남은 때로 가상의 손위아래 형제로 나타나기도 했고, 혹은 성별이 바뀐 나로 대체되기도 했고, 아니면 TV나 이웃에 있는 누군가이기도 했다. '쟤가 딸이 아니라 아들이었어야 했는데... 저 위에 아들이 있었어야 했는데... 저 아래 아들이 하나 있어야 하는데... 저런 아들 하나 있으면 좋은데... 등등' 자식이지만 어느새 소수자가 되어버린 나는 그런 말을 하는 아버지에게서 가끔 신체에 불편함이 있거나 피부색이 검은 사람을 비하하는 표현을 들으면 차별에 대한 교육을 받기 전이었어도 본능적으로 불쾌한 감정이 들었다. 그 사람들이 무슨 잘못을 했기에 비난이나 놀림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나를 포함하여 존재 자체를 인정받지 못한 것에 대한 반감을 감출 수 없었다.
누군가를 판단하고, 규정하고, 평가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지, 주로 언어로 표현되는 그런 일들이 어떻게 크고 작은 파장을 일으키는지, 한 마디의 말이 어떻게 날카로운 칼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과 아픔 때문에 나는 가능한 한 말을 삼가는 아이로 자랐다. 그리고 그 이후는 실수를 줄이면서 될 수 있으면 가장 적확한 표현을 찾으려 백방으로 노력한 세월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말을 유심히 듣고, 책을 읽고, 다른 표현을 찾아보는 등 언어의 길에 대한 방황을 하면 할수록 언어야말로 헐거운 그물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물 사이로 많은 것들이 빠져나가는 것을 잘 알면서도, 건져 올릴 수 있는 것에 대한 한계를 잘 알면서도, 계속 그물을 던질 수밖에 없는 것과 같아 보였다. 기껏해야 할 수 있는 일은 그물을 정교하고 튼튼하게 잘 짜는 일밖에 없어 보였다. 이러한 엄마의 언어관에 대한 영향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보다 상대적으로 더 강한 언어 규정성을 보이는 엄마에 대한 반감 때문인지 보석이는 늘 언어를 통한 자기표현에 답답할 만큼 신중했다. 게다가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을 수도 있는 말이 불러일으킬지도 모를 상대방의 오해와 그 이후의 일까지 생각하느라, 말하기를 더 어려워했다. 그래서 보석이에게서 말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보다 얼굴 표정을 보고 알아차리는 것이 더 쉽고 빠를 때가 많다.
들뢰즈와 가타리에 의하면 '몰'적 체계는 거시적이고 안정적이며 고정된, 그리고 위계적인 구조를 나타내고, '리좀'적 체계는 물의 땅속줄기처럼 뿌리가 불규칙하게 뻗어 나가며, 어떤 지점에서든 다른 지점과 연결될 수 있는 세부적이고, 비위계적이고 유동적인 구조를 나타낸다. 기호계에서 리좀적 체계는 주로 비기표적인 기호계(비언어적 기호)로 상징되는데, 언어계 안에서도 몰적 체계의 언어와 리좀적 체계의 언어를 구분해 볼 수 있다. 주로 명사로 대변되는 몰적 언어는 ’ 아버지‘ ’ 국가‘ 등과 같이 역할과 위계가 자리하고, 이에 반해 리좀적 언어는 형용사, 동사, 유동적인 종결 어미 등으로 정동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을 표현할 때 '그 사람은 쓰레기이다.'라고 규정하며 표현하는 것과 그 사람이 했던 어떠한 행동은 어떠한 이유 때문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주 큰 차이가 있다. 언제부턴가 온오프라인을 넘나들며 몰적 표현이 난무하는 세상이 되었다. 어떻게든 끊임없이 규정하고, 나누고, 대비시키고, 비난한 자리의 나머지 어디쯤엔 가에 온전하지도 않은 은신처를 만들고 숨어버린다.
언젠가 보석이가 반감을 느끼는 언어표현 방식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어떠한 일은 경험상 어떠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마련이다.’ 혹은 A는 B‘이다’ 같은 단정적 표현은 그 논리가 아무리 탄탄해도 세상의 많은 가능성과 변수를 포함하지 않는 부족한 표현이라는 것이다. 너무나도 일리 있는 말이라 반박할 수 없어서 나는 가급적 그러한 표현을 자제하거나 다르게 표현하려고 했고, 어쩌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더라도 바로 수정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인지하지 못하고 표현된 경우에는 보석이에게 그때그때 지적해 달라고 요청했다. 물론 가능성을 열어두는 유동적인 표현은 애매한 표현과는 구분된다. ‘나는 기쁜 것 같다. 기분이 좋은 것 같다’ 같은 유체이탈적 표현이 아니라 향후에 변경될지라도 현재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하고 있는 생각을 스스로 면밀히 관찰하는 표현을 말한다. 단언하고 낙인찍고 영구고정시키는 표현은 스스로와 타인과 상황을 일정한 틀에 가두어버리고 다른 생각을 못하게 만들기 쉽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보석이와 나는 ‘유의하면서도 자유로운 언어와의 관계’를 모색하고 있다. 보석이와 나 그리고 세상을 연결하는 언어의 그물을 잘 짜 보려는 노력은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