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원상처를 극복하는 힘

실수를 비춰주는 거울

by 리좀

“사랑은 저기 저편을 향한 환상이 아니라, 지금-여기를 바꾸는 행동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행동은 우리를 지혜롭게 만들며, 우리 자신의 완고해지려는 마음과 고정되려는 삶, 경직되려는 신체를 부드럽게 녹여내고 변화시키는 원동력입니다. 신승철 『사랑할수록 지혜로워진다 -스피노자와 함께 인생의 새 판 짜기』 中에서”


나는 경상도 출신의 부모님 밑에서 자랐다. 부모님 중 아버지는 유독 목소리가 큰 편이었다. 어머니와는 달리 태어나서 줄곧 아버지에게서 들어온 말은 항상 쩌렁쩌렁하게 큰 소리였고, 게다가 사투리 특유의 억양은 데시벨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했다. 부모님이 대화하는 소리는 항상 싸움처럼 들려서 실제로 싸움인지 아닌지는 귀를 기울여 내용을 파악해야만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젊은 나이였으니 아버지의 청력에는 이상이 없었고, 관련된 얘기는 한 번도 듣지도 못했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작디작은 단칸방 안에서 왜 그토록 큰 소리로 말씀하셨을까. 아버지의 목소리 크기에 대한 미스터리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한 건 친척들과의 모임에서였다. 큰어머니와 작은 아버지를 비롯한 여러 친척 어른들의 목소리가 저마다 비슷한 데시벨로 울려 퍼졌다. 명절과 같은 친척 모임은 어린 나이부터 머리가 텅텅 울릴 정도로 아찔한 경험이었다. 그런데 목소리 크기에 주목하며 자세히 들어 보면 암묵적인 약속이라거나 누가 정한 규칙은 아니겠지만 대체로 친족들 간의 서열과 비례했다. 어른들의 목소리에 비해서 사촌형제들의 목소리는 현저하게 작았고 사촌 형제 중에서도 나이가 많은 손위의 목소리가 가장 컸다.


같은 경상도 출신이지만 어머니의 목소리는 상대적으로 나긋나긋하고 작았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는지, 아버지의 위세 때문에 변한 건지, 아니면 둘 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자식들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래도 아버지의 목소리가 워낙 강력해서 또래의 다른 아이들처럼 집에서 큰 소리로 말하거나 떠들거나 하지는 못했다. 아버지의 목소리 크기는 그저 상대적이고 천성적인 데시벨 차이 이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집 밖에서도 마찬가지로 작동했다. 어딜 가나 항상 과묵하고 조용한 아이, 말 수가 적은 아이, 거기다 목소리가 너무 작은 아이가 되었다. 기껏 용기를 내어 한 말은 듣는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작게 흘러나와서 ‘뭐라고?’ 라는 질문을 받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럴 때면 배에 힘을 좀 주고 의식적으로 더 크게 말하려고 하거나 아니면 더 가까이 다가가서 말하거나 하는 선택을 해야 했다. 눈살을 약간 찌푸리며 네 말을 잘 못 알아듣겠다는 표정의 그 ‘뭐라고?’는 악의가 없다는 것을 잘 알긴 하지만 타인과 대화하는 심리를 위축시키기에는 충분했다. 그 보다 왜 나의 목소리가 이렇게 작게 나오는지에 대한 자괴감이 더 크게 느껴졌다.


나의 목소리가 어머니를 닮아서 작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대학을 졸업한 후 크고 작은 갖가지 조직 생활을 한 지 10여 년쯤 흐른 뒤였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고, 책임자 자리를 맡고, 부하직원과 같이 해야 하는 일이 늘어날수록 때에 따라서 목소리가 커지기도 하는 나를 자주 발견하게 되었다. 목소리 크기에 대한 억압은 다분히 감정의 억압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목소리가 큰 사람이 나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을 때는 나의 목소리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무감정한 텍스트적 지시어만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갖가지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을 때가 많다. 따라서 자의든 타의든 목소리를 통제한다는 것은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 간혹 타의의 힘이 사라져도 스스로에게 부여한 통제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일정 부분의 노력이 필요한 것 같다. 아니면 목소리와 함께 힘을 키우며 타의의 힘을 누그러뜨릴 수도 있다. 선후관계는 잘 모르겠지만 나의 경우 부모에게서 독립하고, 사람들과 부딪치고,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키우면서 깨닫게 된 내면의 억압을 풀면서 더 이상 목소리가 작아서 고민스러운 경우는 없게 되었다. 오히려 자신의 의사와 감정을 가능한 한 명확하게 표현하느라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지는 경향이 나타났다.


어린 자식은 부모에게 늘 약자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부모가 사랑으로 자식을 위해 애를 태우고 맘을 졸여도 자식의 원활한 생존이 부모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없다는 말은 그 자식이 어느 정도 성장한 후에라야 가능한 일이다. 자식이 장성하여도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부모에게 의존하는 부분이 많다면 그 자식은 여전히 약자로 남을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스스로 독립을 이루어낸다면 자식은 비로소 약자의 위치에서 벗어날 수 있고, 오히려 힘의 추가 반대편으로 기울기도 한다. 가장 근본적인 사랑의 출처로 알려진 부보자식 간의 관계를 논하면서 힘의 강약과 기울기가 언급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성장하면서 은연중에 (가장 크게는 부모로부터) 힘의 섭리가 체득되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과 권력이 가장 얽히기 쉬운 곳이 가족관계가 아닐까 싶다. 때로는 권위의 이름으로, 때로는 사랑을 가장하여, 때로는 소망을 앞세우며 다양한 방식으로 권력은 사랑 속에 스며들 수 있다. 그렇게 습득된 사랑과 권력의 작동 방식은 그대로 타인과 후대에게 적용되기도 한다. 그래서 순수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닌 사랑 앞에서는 늘 깨어 있고 각성해야 한다. 의심하고 주의하고 살펴보는 것을 멈추지 않아야 사랑의 순도를 높일 수 있다.


실제적이든 상징적이든 목소리의 크기는 권력과 비례하는 경우가 많다. 누군가를 상대하며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진다면 그 사람은 나보다 약자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한 일은 대체로 의식하지 못하는 수준에서 일어난다. 억압된 감정과 힘의 굴레에서 벗어나 나의 목소리를 되찾은 후, 힘들게 아버지의 목소리 크기에 대한 트라우마와 원상처를 극복한 후, 나도 모르게 자식인 보석이를 향해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랄 때가 있다. 보석이를 꾸중하고 나면 항상 밀려드는 설명하기 힘든 죄책감이 있었지만 그 정체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안타깝게도 그것을 알아차린 것은 시간이 훨씬 지난 후였다. 어렴풋이 인지한 후에도, 변명 같지만 너무나 오랫동안 몸과 마음에 뿌리내린 작동방식이어서인지 항상 상황이 벌어진 후에 깨닫곤 했다. 엄마가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할 때마다 받았을 상처 속에서도, 엄마에 대한 기대를 접지 않고 끊임없이 부정적인 표현방식과 목소리의 데시벨을 지적해 준 보석이에게 미안할 뿐이다. 원상처의 완전한 극복은 외부로의 전이 없이 내부에서 종식되어야 비로소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게 해 준 보석이에게 감사할 뿐이다.

keyword
수요일 연재
이전 13화너에게 전하는 한 그릇의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