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랬구나 그렇구나
'그래... 그랬구나'
한 시대를 풍미한 대표 예능인
무한도전 '무한상사'편에서 나온 장면이다.
본래 '그랬구나'를 통해 상대방을 이해하고
너그럽게 봐주며 응어리를 풀어내기 위한 자리였지만
박명수 님은 이 '그랬구나'를 묘하게 활용하여
보는 이들로 하여금 큰 웃음을 유발하였고
이 장면은 짧게 편집되어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인생이라는 큰 흐름을 일개 인간의 몸으론
막으래야 막을 수 없다.
이는 한강을 티스푼으로 막는 것과 같다.
아무리 애쓰고 용을 써도 결국 인생은 흘러간다.
하지만 대다수 인간들은 두려움으로 점 칠 된 '욕망'으로
이 큰 흐름을 자신의 주관(에고)의 기준으로
바꾸려 하니 그들의 인생은 끝없이 힘들고 불안하고 불안정해진다.
인생이라는 큰 흐름에 몸을 맡기고
그 흐름을 온전히 느낄 수 있을 때
그때서야 인간은 비로소 그곳에 온전히 존재하게 된다.
성경에서 말하는 아버님의 집이자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열반에 이르는 것이다.
이 흐름에 온전히 몸을 맡기고
그 흐름을 타며 즐기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존재한다.
'소극적 참여자'와 '적극적 관찰자'가 되는 것이다.
오늘은 이 두 가지 중 '소극적 참여자'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
이 소극적 참여자가 된다는 것은
인생이라는 큰 흐름에 온전히 몸을 맡기고
우주 만물이 마음을 통해 나에게 펼쳐 보여주는
삶이라는 것을 온전히 순응하는 것이다.
이 순응한다는 것은 절대 의식 없이 무작정 받아들인다는 뜻은 아니다.
영화 속 주인공의 시점이 아닌 (에고의 나)
영화의 감독의 시점에서 이를 순응하는 것이다(내면의 나)
이른바 '내맡기기'라는 방법이다.
하루를 살면서 한 번쯤 이런 생각이 떠오를 것이다.
'아 이건 내 스타일 아닌데'
'아 저건 안 했으면 좋겠는데'
'쟤는 왜 저러는 걸까'
'이건 하기 싫은데? 너무 짜증 나는데? 거부해야겠다'
보통 인간들은 이 떠오르는 생각을 내비게이션 삼아
생각이 이끄는 대로 행동한다.
이것이 앞서 이야기한 생각나는 대로 사는 삶(대중)인 것이다.
이렇듯 어떠한 상황이나 물건이나 다른 인간에 있어
떠오르는 생각들은 그간 에고가 쌓아온 기존의 '습'들이다.
교육을 통해서든 부모를 통해서든 친구를 통해서든
주변의 영향을 받아 설립된 에고가 기준이 되어
펼쳐지는 세상을 판단하여 호불호를 가린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이미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렇다 이것이 보편적으로 인생이라는 흐름을 거부하는 방식이다.
대다수 에고에 의해 설립된
개인적인 호불호를 따라간다.
하기 싫은 일이거나 귀찮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눈떠보면 결국 당신은 그 일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 일을 하면서도
쫑알쫑알 한시도 쉬지 않고
당신의 머릿속에서 떠들고 있는
에고의 기준에 그대로 따라간다.
이렇게 머릿속에서
에고가 강하게 반발하는 생각이 떠오를 때
에고의 시점인 '나'가 아니라
마음의 시점인 '나'로 옮겨가는 것이다.
우리는 앞서 내 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시선을 알아차리고 깨달았다.
떠오르는 생각과 연상되는 이미지를
그저 듣고 바라보고 있는 존재를 말이다.
소극적 참여자의 시점이란
바로 이 시점으로 한 발 움직여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에고의 생각을
따라가는 것이 아닌 그 반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어떤 일을 강하게 하지 말라고
에고가 이야기할 때
에고가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아 지금 에고가 이렇게 시끄럽게 이야기하고 있구나 그렇구나'
'그동안 그랬으니 그럴 수 있지'
'난 그동안 습관처럼 떠오르는
이 생각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었구나 그랬구나'
이 순간 '그랬구나'와 '그렇구나'라는
짧은 단어는 어떤 단어보다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떠오르는 생각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몇 번이나 강조했지만
그 무엇도 잘못되거나 틀린 것은 없다.
그렇기에 이 세상에 펼쳐지는 모든 것의
존재의 가치를 존중해 주는 것이다.
단지 떠오르는 생각을 알아차리고
짧은 두 단어를 통해 인정하고 존중해 주며
생각에 매몰되어 하나 되는 것이 아닌
마음의 시점으로 한 발 물러나
펼쳐지는 상황과 세상에 온전히 참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