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킷리스트를 쓰던 청년은 지금 무엇을 기다리며 사는가
젊은 시절의 나는 늘 목이 말랐다.
세상이 넓다는 걸 알았고, 나는 너무 작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더 많이 해보고 싶었다.
군대에서의 시간은 유난히 길었다.
2년 반이라는 시간은 스무 살 청년에게는 형벌에 가까웠다. 특히 새벽 보초 근무 시간. 세상은 잠들어 있고, 나는 철모를 눌러쓴 채 어둠 속에 서 있었다. 그 적막 속에서 나는 늘 작은 수첩을 꺼냈다.
그리고 무언가를 적었다.
가보고 싶은 나라
배워보고 싶은 것들
사귀어 보고 싶은 이상형
돈을 벌면 해보고 싶은 일들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고 철없어 보이지만, 그때의 나는 진심이었다.
그 수첩은 나에게 감옥 안의 탈출구였다. 몸은 그 자리에 묶여 있었지만, 마음은 늘 다른 세상으로 떠나 있었다.
세월이 한참 흐른 뒤, 우연히 그 수첩을 다시 펼쳐본 적이 있다.
누렇게 변한 종이 위에 삐뚤빼뚤한 글씨들.
이상하게도 한참을 들여다보게 됐다.
그리고 하나씩 떠올랐다.
해외에서 살아본 시간들,
직업을 몇 번이나 바꿔가며 헤맸던 날들,
사업이라 부르기엔 어설펐지만 온 힘을 쏟았던 시도들,
사랑에 빠져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던 순간들,
그리고 사랑 때문에 바닥까지 내려갔던 시간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이미 지나와 있었다.
그 수첩 속 청년은 ‘언젠가’를 꿈꿨고, 나는 어느새 그 ‘언젠가’를 대부분 살아버린 사람이 되어 있었다.
젊은 날의 나는 열정이 과했다.
좋아하는 여자를 만나기 위해 별 걸 다 배웠다. 말 잘하는 법, 분위기 잡는 법, 기타 치는 법, 춤까지.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지만, 그때는 사랑도 전쟁이었고 연애도 노력의 결과라고 믿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의 나는 늘 앞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더 뜨겁게 살지 못할까 봐 불안했고,
남들보다 늦게 갈까 봐 초조했고,
무언가 되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쉼 없이 다음을 향해 달렸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조금 다르다.
아들은 어느새 훌쩍 자라 자기 인생을 준비하고 있고, 나는 은퇴 이후의 삶을 계산하고 있다. 연금, 보험, 병원, 노후 자금. 예전에는 들어도 멀게 느껴지던 단어들이 이제는 하루 생활 속으로 들어와 있다.
요즘의 나는 무엇을 더 할까 보다 어떻게 덜 힘들까를 더 자주 생각한다.
새로운 도전보다는 유지,
설렘보다는 안정,
시작보다는 정리라는 단어가 마음에 더 오래 남는다.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제 그냥 죽을 날을 조용히 기다리는 쪽으로 방향을 튼 건 아닐까.
스스로에게 물어놓고도 마음이 씁쓸했다.
분명 아직 살아 있는데, 마음 한쪽이 먼저 은퇴해 버린 느낌이다.
무언가를 향한 젊은 날의 열정을 다시 느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