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재혼 후의 일이다.
서문 국민학교 1학년 김미영은 일 년을 무사히 보내고 봄 방학을 맞이했다.
곧 새 학년이 되는 것이다.
그때의 나는 여느 친구들의 흔한 설렘을 느끼지 못했다. 늘 손톱 끝에 피가 고였다. 유독 키가 작았던 초등학교
1학년 여자 아이는 손톱을 뜯었다.
애꿎은 손톱 끝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 피가 났다. 그 피의 맛이 좋았다. 두꺼운 겨울 외투가 무겁게 느껴지는 포근함이 싫었다.
그렇게 2학년이 된다는 게 실감이 날수록 피의 맛을 느끼려 안달이 났다.
새 학년이 되면 새로운 담임 선생님을 만난다.
담임 선 생님에겐 학기 초에 가정 조사서를 내야 한다.
그 사실이 어린 내손의 손톱을 가만 두지 않았다.
나는 말수가 적고 부끄러움이 많았다.
학급 친구들은 봄 내내 나의 이름을 제대로 외우지 못했다.
아니, 외우지 않았다.
그럴수록 나는 고개를 땅과 마주 한채 수평을 이루며 다녔다.
가난한 흙 수저, 재혼 가정의 맏딸.
이미 학급 친구들의 엄마들은 친구들에게 좋은 친구를
사귀는 법을 단단히 알려주며 나의 이름을 들먹인 후였다. 한 번은 이런 날도 있었다.
쉬는 시간, 나는 책상에 혼자 앉아있었다.
여러 친구들과 떠들고 장난치고 놀던 다른 아이들과는 애초부터 다른 길을 가는 사람처럼 제대로 말을 섞어본 적도 없었다.
그때 두 명의 여자아이와 남자아이 한 명이 갑자기 내 책상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입가가 저절로 올라갔다.
혼자 있는 친구에게 말을 거는 착한 친구들에게 나는 어떻게 반응할까?
이번엔 기필코 용기를 내보이겠다고 조심스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 다가오는 세 명의 아이들의 눈꼬리가 올라가며 미간에 주름이 갔다.
그들의 한 손은 코를 막았다.
나를 툭툭 건드려 가며 놀려 댔다.
이 썩은 내가 어디서 나게?
아 더러운 냄새 코가 썩을 것 같아 거지가 왜 우리 반에 와 있지?
그 순간 나는 한마디 말도 못 했다.
조잘조잘 말을 잘하는 여자아이들과 힘이 셀 거 같은
남자아이.
그저 그 아이들이 무서워 엉엉 울면서 책상에 엎드려 버렸다.
혼자 있는 아이에게 친구가 되어줄까 내심 기대하며 설렜던 내가 참 바보 같았다.
나를 함부로 대하는 아이들에게 말 한마디 못하고 바보처럼 울며 당하는 내가 서러웠다.
그때 얼마나 울었는지 코에 콧물이 줄줄 흘러 얼굴에 콧물과 눈물이 범벅이 되었어도 창피해서 일어나 닦을 수 없었고 그저 아이들이 빨리 돌아가길 바라며 엎드려있던 찌질한 나였다.
나는 그런 일을 겪고도 엄마나 선생님께 말하지 못했다. 그때의 내가 왜 그랬는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나는 늘 그랬다. 어른들의 눈엔 조용한 성격에 조잘대지 않고 특별한 말 썽 없이 그저 말 잘 듣는 착한 미영이의 모습이었다.
가난했던 살림에 학원을 다녀 본 적도 흔한 전과 책 한 번 가져 본 적 없었다.
그래도 나는 늘 겨울 방학식 날인한 번도 빠지지 않고 상장을 받으러 교실 앞으로 나갔다 일 년 동안 공부를 잘하고 성실함을 인정하는 우수상을 받으러 교실 앞으로 나갈 때도 주목받는 게 부끄러워 고개를 푹 숙인 채 조용히 걸어 나가 두 손으로 상장을 받아 조용히 자리에 돌아갔다.
그때마다 내 귓가엔
"네가?"
라고 하는 듯한 반 아이들의 야유가 들리곤 했었다.
그렇게 나는 상을 받는 자랑스러운 순간에도 누구 한 명 같이 기뻐해줄 친구도 없었고 고개를 들고 당당히 나가지도 못할 만큼 찌질했다.
그런 나에게 새 학년이 되면 써가야 했던 가정조사문은 가만히 있어도 불쌍해 보이는 나를 한층 더 초라하게 만들었다. 가정조사문에 적어내야 했던 내 치부들은 한가득 이었 다.
나를 비롯해 우리 가족의 신상을 적어 내보이는 일은 우리 집에서 아빠와 성씨가 달랐던 나만 이방인처럼 보이게 느껴졌다.
아빠와 여동생의 이름은 노희순. 노지선. 나는 김미영.
조사서에는 부모의 학력도 써내야 했는데, 국민학교 3 학년을 중퇴한 엄마가 창피해서 나는 늘 엄마의 학력 란에 국졸이라고 적어서 냈다.
함께 내야 했던 주민등록 등본엔
본인 노희순 처김순자
자녀 노지선 동거인 김미영(호주 김정훈)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 늘 내 이름 뒤에 따라다니는 (호주 김정훈)은 나를 더 슬프게 했는데 엄마에게 물어볼 용기도 없어서 그냥 내 친아버지 이름 인 줄로만 지레 짐작하며 지냈
다.
나중에야 알았다. 죽은 사람 이름은 등본에 표시되지 않는다는 걸......
나중에 호주 법이 폐지되고 나서 그 이름은 더 이상 나를 따라다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