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아빠가 돌아가시고
엄마와 나는 각자의 삶을 살기로 했다.
엄마는 새아빠의 빈자리를 힘없고 약한 내가 아닌
엄마가 기댈 수 있는 또 다른 남자 친구로 채우려 했다.
나는 그런 엄마가 싫어서 따로 지내기로 했고
알바를 하게 된 주유소에 달린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보통 남자들이 쓰는 기숙사인데
나를 배려해 방을 하나 내어 주었다.
긴 시간 그곳에서 하루 12시간씩 일을 하며 지냈고
얼마의 돈을 모았다.
나는 겨우 모은 돈으로 시내에
다가구 지하 단칸방을 구했고
밤에는 호프집 알바 낮에는 미용학원을 다녔다.
중학교 때부터 한창 멋을 부리고 다닐 때
미용실에 가면 거기 선생님들이 날 보며 미용을 하면 어떻겠냐고 종종 얘기하곤 했었다.
그때 그 이야기 영향 때문인지 나는 미용기술을 배워서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고 미용학원을 다니며
자격증을 땄다.
흙집에서 벗어나 주유소 기숙사를 거쳐
처음으로 문도 있고 화장실도 주방도
집안에 달린 집에서 살게 되니 비록 바퀴벌레와
함께 생활하는 지하 방이어도 그저 좋기만 했다.
그런데 한 가지 바퀴벌레보다 서러운 기억이 있다.
내가 살던 그 지하 단칸방 앞에 정화조가 있었는데
집주인이 같이 살지 않아 깜박하고 정화조 청소를 조금이라도 늦게 하면 온갖 똥오줌 오물이 지하에 있는
내 방 화장실 변기를 통해 넘쳐 화장실 전체가 난리였다.
그땐 또 왜 이리 서럽고 눈물이 많이 나던지 그래도 살아야 했기에 울며 청소하고 살았던 기억이 남아있다.
미용자격증을 따고 학원 원장님께 잘 보였던 나는
그 당시 인턴 한 달 월급이 20-30할 때 나는 70만 원짜리 대형 샾에 취업을 하게 된다.
근데 월급 70만 원에 날마다 점심값 매달 월세 내고
생활비 하고 다달이 힘들다고 하는 엄마 용돈까지
감당이 안 됐다. 결국 헤어디자이너의 꿈을 6개월 만에 포기하고 그곳의 만류에도 미용일을 그만뒀다.
다들 같이 일하는 내 또래 직원들은 부모 밑에서
꿈을 꾸며 일을 할 때 나는 생활비에 허덕이는 고민을 하며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그만두는 게 그저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난 뒤 나는 취업 신문을 갖고 와서
다른 일자리를 찾아봤다.
시간당 2만 원이라는 광고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일당 10만 원은 넘는다고 적혀 있었다.
광고의 업체는 노래방이라고 되어있었다.
뭐 중고등학교 때 놀만큼 놀았고
당장 먹고살아야 할 일들이 나를 힘들게 했기에
그 광고는 나를 겁 없이 그곳으로 가게 했다.
지금 생각해도 나는 무슨 용기였을까?
성숙해 보이려는 옷과 짙은 화장 불편한 하이힐을 신고 그곳에 갔고 그날 바로 일을 시작했다.
낯선 사람들과 웃고 떠들고 술을 마시며......
일은 생각보다 적응하기 수월했다.
그날 나는 광고대로 10만 원이 넘는 돈을 손에 쥐고 집에 왔다.
하루에 10만 원이 넘는 돈을 받게 되니 일은 힘들어도 조금만 하면 될 거 같았다.
그리고 내 몸을 지키는 선은 넘지 않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이 정도는 감수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몇 개월만 바짝 일해서 돈을 모아 다시 미용실에 취업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일이 나의 20대 초중반
전부를 그곳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방황하게 되는
삶의 시작이 될 줄은 그날 나는 전혀 몰랐다.
그곳엔 내가 상상했던 TV에서 본 무서운 언니들도 없었고 악덕 업주들 때문에 수천의 빛을 지어야 한다는 무서운 뉴스의 이야기들도 없었다.
다들 사연 없이 나온 언니들이 없었고 노래방 사장님들도 TV에서 보던 그런 무서운 업주들도 나는 못 봤다.
다들 그곳도 치열하게 하루를 살아가려고 애쓰는 사람들로 보였다. 그곳에서 나는 또래 친구, 그리고 언니들과 친하게 지내며 서로의 삶이 위로가 됐고 점점 일상이 됐다.
TV에 나오는 사람들의 유형은 내가 만나지 못한 모양이다.
몇 달만 바짝 벌어야지 했던 처음 계획과 다르게
나는 무질서하고 계획 없이 자꾸 내일부터 내일부터
미루며 점점 내가 계획한 일상이 아닌
그저 하루 살고 하루 버티며 내일의 희망 같은 꿈도
사라진채 하루하루 살아갔다.
밤낮이 바뀐 일상과 매일 술과 담배에 절어있었고
남자 유흥에 빠져있다가 아침이 되면 허무하게 쓸쓸히 지하방으로 돌아가는 매일 똑같은 하루하루.
그러던 중 자꾸만 눈에 띄는 간판들이 보였다.
그것은 점을 치는 무당 집 간판이었다.
어느 날 한번 호기심에 친구와 무당집에 들어갔다.
생각보다 무섭지 않았고 괜찮았다.
점을 봐주겠다던 무당은 몇 가지 질문과
어떤 의식을 하고 갑자기 목소리가 바뀌더니
내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
"얼마나 힘들었니? 가여운 딸아...."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그간 쌓였던 서러움들이 모두 폭파했다.
처음부터 끝이 없는 터널 속에 갇혀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걸어가야만 하는 그 고통스러운 순간조차
겉으로 내보이지 않으려 속으로 꾹꾹 억누르며
그저 내 삶이려니 살아가는 나였다.
그런 내게 엄마도 누구도 아닌 처음 보는 무당 아줌마의 따뜻한 손이, 나를 가엽다고 말해주며 흘리는 눈물이 내 마음을 그 순간 뜨겁게 위로해 주었다.
그 뒤로 나는 무당집을 찾게 되었다.
그때 그 위로가 목말랐던 거 같다.
거의 미친 듯이 틈만 나면 찾아다녔다.
전국방방 곳곳에 유명하고 용하다는 무당까지 전부
찾아다녔다. 한 번은 강원도 어디였는데 만신이라고 하는 할머니 무당을 만난 적이 있다.
밤새 노래방에서 술 마시고 놀고 한숨도 못 자고
술은 안 마신 언니 차를 타고 겨우 강원도 만신 무당집에 도착했다.
정말 앞도 잘 안 보이는 백발의 할머니였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면 할머니 무당은 자꾸만
뭐라고?
뭐라고? 고개를 흔들거리며 되물었다.
알고 보니 귀도 안 들려서 보청기를 끼고도 잘 못 알아듣는 할머니가 그렇게 용하다고 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간 거다.
처음 나의 손을 잡고 눈물을 보이며 가엽다고 해준 무당아줌마부터 보청기를 끼고도 잘 못 듣는 만신 할머니 무당까지 빠지지 않고 하는 말은 나보고 자기들과 같은 무당 팔자라는 것이다.
내가 무당 팔자라고?
그리고 무당들은 하나같이 우리 엄마를 흉봤다.
처음엔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의 위로가 나를 울렸고
그 말에 점점 중독이 되어 날마다 찾아갔고
내 마음에 서운함 가득 남아있는 엄마를 대신 뭐라 해주는 거까지 전부 내 마음의 위로가 되었다.
무당들은 하나같이 내 팔자가 세다고 보통 센게 아니란다.
한 번은 어떤 무당아줌마가 너는 오늘 당장에 신내림을 받으면 바로 "당장 작두도 탈년이야"라고 말한 적도 있었다.
무당이 되면 크게 되고 돈도 많이 벌 것이라고 말했다.
자꾸만 그 말들이 정말 사실이고 나는 내가 무당이 되어야만 할 거 같은 마음이 자꾸만 가슴에 새겨져 무당 팔자라는 말이내 것이 되어갔다.
무당팔자가 무슨 말인지 무슨 뜻인지나
나는 제대로 알고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