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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미국 좋다 그랬어

[전민교 작가]

by 은나무


“미국에 10년 넘게 사는 거 보니,

역시 미국이 살기 좋나 보다.”



유학생으로 건너와 직장인이 되기까지,

어느새 미국 생활 11년 차다.

그래서인지 종종 부러운 시선을 받는다.

“영어 잘해서 좋겠다”

“LA에서 일한다니 멋지다.” 같은 말들.



만 19살,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직후였다.

할리우드 사인을 직접 볼 수 있다며 들떴고,

바다를 보며 서핑도 배우고,

넓은 도로에서 스케이트보드도 타겠다고 다짐했다.



뜨거운 LA엔 화끈한 언니들이 많을 테니,

출국 직전 머리를 빨간색으로 염색했다.

모범생 이미지를 벗고, 구릿빛 피부에 스모키 화장이 어울리는 핫걸로 다시 태어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현실은 달랐다.

영어를 제법 한다고 생각했는데,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미드보다 훨씬 빠른 말투,

학교에선 배우지 못한 슬랭과 표현들.



당황스러웠다.

로컬 친구를 사귀겠다는 의지는 언어 장벽 앞에서 사라졌고, 동아리든 야외 활동이든 나만 겉도는 느낌이 뚜렷했다.

말을 걸어도, 웃어도, 자연스럽게 무리에 섞이지 못했다. 인종 차별은 아닐 거라며 애써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렇게 나는 핫걸이 되지 못한 채,

머리만 붉은 한국인 유학생이었다.

그래도 ‘열심히 하면 뭐라도 되겠지’ 하는 한국인의 근성으로 버티며 공부했고, 3년 반 만에 졸업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영어는 여전히 어색했고, 비자도 불안했다.

1년만 유효한 OPT(미국 유학생이 졸업 후 전공과 관련된 분야에서 합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취업 허가 프로그램)를 가진 동양인 여자로서, 취업 시장은 벽처럼 느껴졌다. 하루에 30개 넘는 회사에 지원하며 두 달을 버텼지만, 연락은 없었다. 간혹 면접까지 가도, 최종 합격은 남의 일이었다.



그렇게 OPT 유예 기간 종료 2주 전까지도 소식은 없었다. 마음을 접고 한국행 짐을 싸던 중, 한국어와 영어가 모두 가능한 행동 심리사(behavior technician)를 찾는 구인 공고를 발견했고, 운 좋게 취직에 성공했다.

돈은 적었지만, 미국에서 첫 직장을 가졌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했다.



지금 나는 서른.

그 사이 대학원을 졸업하고 자격증도 따

심리 상담사가 되었다.

겉으로 보기엔 성공한 삶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누군가 “미국 어때?”라고 묻는다면,

마냥 좋다고는 못 한다.

작은 원룸에서 외로움에 울었던 밤도 수없이 많았고,

지금도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영어 공부를 계속하고 있다. 이민자로서 언제 해고될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여전하다.



그렇지만 이곳에서 보낸 20대는 분명

내 안의 무언가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언어도, 문화도, 정체성도 어설펐던 내가 낯선 땅에서 버티며 이뤄낸 모든 시간은 살아남기 위한 도전이자 성장의 기록이었다.



누군가 “미국 살아서 부럽다”라고 말한다면,

내가 살아남기 위해 밤마다 흘렸던 눈물을 보여주고 싶다.



나는 그때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던

20대의 나에게 “잘 견뎌왔고 고생 많았어”라고 말해주며 토닥여주고 싶다.




저자 소개


이 글의 작가는 청각 장애를 가진 30대 이민자이자 비영어권 외국인으로 미국에서 심리상담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20대에 꿈을 안고 유학길에 올라 현실의 벽 앞에 무너지고 버텨가며 지금의 시간이 오기까지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그녀는 청각장애를 갖고도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듣고 치유해 주는 심리상담사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한번 들려 보시고 응원도 부탁드려요!


https://brunch.co.kr/@minkyo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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