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 기대고 싶었던 날

by 은나무


그가 살고 있는 곳은 가게에서 멀지 않았다.
번화가를 벗어난 조용한 주택가.
그는 오피스텔에서 임시로 거주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 남자의 친한 지인이 가게에 왔다.
그는 나와 상아 언니를 데리고 들어갔다.
잠시라도 편하게 해 주려는 배려 같았다.



웬만하면 눈에 띄지 않게
테이블 순서 조절도 잘하고, 나를 불편한 룸에 안 넣었다.
그날도 그는 아무렇지 않게
나와 언니를 자기와 지인 옆에 앉혔다.



그는 마치
‘나는 이 여자와 아무 관계 없습니다’
라는 듯, 자연스럽게 거리를 뒀다.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하게
나를 소중히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냥 언니랑 술 한잔하러 나온 기분으로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술도 한 모금씩 들어가고.



편안함 때문이었을까,
홀짝홀짝 마신 위스키가 은근히 취기를 올렸다.
‘정신 차리자… 괜히 실수하지 말자…’
혼자 조용히 다짐을 했다.



그날 영업이 거의 끝나갈 때쯤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그 남자였다.


“오늘 끝나고 한잔 더 할래?”
“좋아요”


원래 한번 마시면
애매하게 끝내는 걸 못 참는 성격이라
딱 기분 좋은 알딸딸함으로 더 달리고 싶었다.



마침 상아 언니도 일 끝나고
그 유부남 애인을 만난다고 했다.
그녀의 뒷모습은 늘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퇴근하자마자
그가 슬쩍 건네준 차 키를 들고
지하주차장 그의 차 안에서 기다렸다.
심장이 조금 빨리 뛰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술 냄새 하나 묻히지 않은 말끔한 모습.
아까 지인과 술을 마시지 않은 이유를
나는 그때 이해했다.



가게 근처는 아는 사람을 마주칠 수 있으니
멀찍한 곳으로 옮기자며
그의 집 근처 해장국 집으로 갔다.



소주 한 병을 시켜 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정말 어른스러워 보였다.
듬직했고, 애써 세상과 싸우는 내가 기대고 싶은 느낌.



‘이 사람이라면…’



짧은 순간이었지만 달콤한 상상에 취해버렸다.
술 때문인지 외로움 때문인지 나도 모르겠다.



소주 두어 병을 더 마신뒤 해장국 집을 나와
그의 오피스텔 현관 앞에 섰다.



문이 열리는 순간, 따뜻한 공기가 훅 밀려 나왔다.
그리고 숨어 있던 알 수 없는 무언가도 같이 밀려 나왔다.



나는 그걸 그땐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그날,
내가 처음으로
그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만 기억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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