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도시에서의 삶은 처음엔 모든 게 어색했다.
살면서 이렇게 가까운 곳에 이런 도시가 있는 줄 처음 알았다.
나는 이제 혼자다.
그렇게 바라고 바랐던 탈출.
내 물건 하나 제대로 챙겨 오지 못하고
나의 모든 흔적을 지우고 세상에 없는 사람처럼 지내는 이상하고 외로운 하루하루.
막상 자유를 위해 탈출했는데 너무 조용해서 외로웠다.
처량하게 외로움 타령하고 있을 때가 아니란 걸
그 집에 온 지 일주일쯤 지났을 때 정신이 차려졌다.
나는 살기 위해 그 긴 시간을 견디고 버텼고
이 시간을 위해 또 긴 시간 준비하고 여러 사람의
도움도 받았다.
그런데 이렇게 넋 놓고 외로움 타령이라니...
나는 미용실부터 알아봤다.
이제 혼자서 먹고 살만큼 벌 수 있는 기술을
익혔기에 당장에 돈을 구해야 하는 절박함은 없었다.
이제 나는 다시 태어났고 새로운 삶을 지금부터
다시 쓰면 되는 것이다.
이곳에서 소개받은 미용실은 남자 원장이 일하는 곳이었다.
나보다 4살 많았던 젊고 세련된 모습의 남자 디자이너의 모습이 내겐 새로운 세상처럼 보였다.
나는 다음날부터 출근했다.
나이대도 비슷한데 이미 대형샾에서 쌓아온
경력과 실력이 부러웠다.
그리고 개인 샵을 차려 원래 단골 고객들이 찾아왔고
고급 살롱보다는 살짝 다운된 가격으로 제품은 똑같이 고가의 제품을 사용하면서 운영했다.
이곳에서 나는 새로운 세상의 미용을 보게 되었다.
그전에 있던 원장님에게 기본기를 탄탄히 배웠다면
이 남자 원장에게는 고급 스킬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일할 때만큼은 지난날들이 생각나지 않았다.
항상 내가 보아오던 사람들과는 다른 분위기
모든 게 새롭고 재밌었다.
원장님과 결이 잘 맞아서 고객들이 오해할 때도 가끔 있었다.
어느새 남자들을 더러운 시각으로 보던 내 눈도 점점 정화돼 가고 있었다.
일은 재밌고 점점 일상이 안정되어 가는 듯했지만 집으로 돌아와 혼자 있는 시간이면 늘 외롭고 무서웠다.
퇴근길 내손엔 매일같이 소주 한 병? 맥주 큰병 하나
편의점 봉투에 들려있었다.
그걸 마셔야 잠이 들었고 티브이를 틀어놓고 자야
잠을 잘 수 있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나는 살며시 주변에
연락을 시도해 보았다.
이선우가 가게에 나를 찾으러 왔었는지 혹시 전에 만났던 언니들이나 친구들에게도 소식을 물어봤다.
엄마에게도 연락 한번 없다고 했다.
이상했다.
분명 난리를 쳐도 열두 번도 더 치고 남을 사람인데 잠잠하다니. 다행인 듯싶으면서 오히려 조용한 게 또 무서웠다. 그렇게 그에 대해 소식이 없어진 지 몇 달 후
나는 혼자 잘 적응하고 있었다.
어느 날 친구에게 문자가 왔다.
[야! 나 지금 서울 00동에 남자친구랑 00 식당에
밥 먹으러 왔어. 근데 지금 여기 이선우 있어.
어떤 남자랑 둘이 왔는데 무슨 사업얘기 하는 거 같아.
나는 등 돌리고 앉아 있어서 이선우가 나는 못 본 거 같아.
봐도 뭐 나 혼자 아니니깐 상관없어. 자 봐봐 사진 이선우 맞지!]
친구는 멀리서 확대해서 찍은 흐릿한 사진과 함께
문자를 보내왔다.
맞다.
이선우.
나를 찾아다니지 않았다고 해서 조금은 걱정했는데 잘 살고 있는 거 같아 다행이다 싶었다.
한때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웠고,
차라리 내가 죽어서 저 인간에게 평생을 죄책감으로
살게 해주고 싶다고 원망하고 증오하던 인간인데
그놈의 연민이 뭐라고....
사진 한 장에 잘 지내는구나, 다행이다 싶은 마음이 드는 내가 의아했다. 그래도 그와 지냈던 시간들이 늘 고통만 있던 건 아니었단 생각이 들었고, 나 없이도 잘 지내라고 마음속으로 빌어 주는 나를 보았다.
나는 이선우가 잘 지내고 나를 찾지 않는다는
소식에 점차 마음이 놓였고
새로운 곳에서 잘 적응하며 지냈다.
나는 다시 이전 전화에서 친구 목록에 내 연락처를 남겼다. 점점 옛날 친구들과 다시 연락도 하고
제일 미안했던 지현언니 소식도 들었다.
지현언니는 내 소식에 기뻐했고 나는 언니에게 미안한 마음에 예전처럼 마음이 편하진 않았다.
점점 시간이 가면서 자연스러워질 때를 기다리면
될 거라 생각했다.
갑자기 상아언니한테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언니가 서울에서 다시 일하게 됐는데 우연히 이선우를 마주쳤다고 했다.
언니는 반가움에 인사를 했고
"오빠 연이는 잘 지내? 어떻게 지낸데 궁금하네"
라고 물었는데 이선우의 대답이 의외였다.
"연이랑 헤어졌어. 이제 연이도 나이가 있는데 잘 살게 보내줘야지. 나랑 고생만 했는데. 상아 너도 잘 지내"
그렇게 우연히 마주쳐서 이선우에게 들었다며 내게 이선우랑 헤어진 게 맞냐고 연락이 왔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이선우가 왜 나를 찾지 않았는지
문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나를 찾는 거보다 자신의 자존심이 중요했다.
나를 찾아다닌다는 건 내가 어찌 됐던 자기를 피해
도망간 사실이 인정이 되고 스스로 그렇게 티 내고 다니고 싶지 않았던 거 같다.
그리고 내가 마음먹었던 그날 이선우가 한 말이 생각났다.
미용기술 배워서 나중에 자기 버리고 도망이나 가지 말라고 했던 말.... 이미 그는 어느 정도 예상 하고 있었을지도....
상아 언니의 이야기까지 듣고 보니 이제 완전히 나는
자유해지고 해방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점점 자유로움에 익숙해질 무렵.
어느 날.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내 평생의 반려자를 만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