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의 새로운 길
새로운 길
윤동주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윤동주의 '새로운 길'은 1938년, 21세의 시인이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한 직후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시대 상황 속에서 쓰였다. 이 시에서 '새로운 길'은 인생과 삶을 상징하며, 시인은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겠다는 의지를 표현한다. 이는 개인적인 다짐을 넘어 억압받던 민족의 염원을 은유적으로 담아낸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 시는 우리에게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말고 새로운 도전과 성장의 기회를 끊임없이 모색하라고 말하고 있다.
스스로만 잘 처신하며 살면 되었던 스물,
마음이 맞는 이들과 해외 자원봉사를 하며 열정과 재정과 삶을 드렸다.
육 적인 기대와 소망을 넉넉히 절제할 수 있는 삶이었고,
그렇게 나를 나누는 순간순간이 하나도 아깝지 않은 시간이었다.
내가 원했고,
바랐고,
자부심을 가지며 살았기에 소중했다.
결혼 후,
내 삶의 방향, 길은 750° 정도 바뀌었다.
돌고 돌고 돌아 비켜 나간 길이었다.
내가 바라던 가정, 내가 바라던 남편, 내가 바라던 내 아이들의 어머니, 내가 바라던 자아상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졌다.
그저 바라던 바였음을 깨달았다.
머리는 빙글빙글 돌았고, 마음은 헤집어졌고, 길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주어진 삶을 살고, 살아가며, 버티며 걸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멈추지 않았다.
길을 가며 수많은 감정과 반란들이 내 안에서 동요할지라도 그냥 걸었다.
결혼 전 기독교기관에서 주관하는 상담학교와 중독상담학을 수료했다.
이후 기회가 닿아 1년간 마음의 아픔이 치유되기를 소망하는 사람들과 함께했고, 그들의 회복을 지원했다. 내담자를 직접 대면하고 지원하면서 스스로도 많은 부분에서 실제로 회복을 경험하기도 했고, 유의미한 경력, 내면의 힘을 키웠다.
그 안에서 나는 좋은 리더들을 만났고, 참된 권위를 행사하는 아버지, 돕는 배필로서의 어머니를 경험했다.
그리고, 이상적인 가정을 꿈꿨다.
그러나, 이상적인 가정은 나만의 꿈이었다.
현실적으로 참된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내 아이의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남편을 성실하게, 지혜 있게 돕는 배필로서의 아내도 찾을 수 없었다.
아기는 그렇게 잘 생기는 것인지 꿈에도 몰랐다.
허니문 베이비에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생초보 신혼생활이었다.
남편과 임신한 아내로 살아가는 신혼 초기부터 우리는 무던히도 삐걱거렸고, 첫째를 출산 후에도 우리의 방황은 지속되었다.
9년의 경력을 가지고 있던 직장을 떠나게 되었고,
우리의 신혼은 낯선 해외 생활에서 계속되었다.
우리 부부는 16개월 된 첫째 아들을 데리고 태국으로 자원봉사를 가게 되었다.
타국에서 둘째를 출산하겠다는 겁도 없는 계획과 함께,
해외 경험이 많았었기에 그곳에서 쉽게 적응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했으나 그것은 크나큰 착각이었다.
적응하며 지내던 중 우리가 소속되어 함께했던 자원봉사 단체 리더십과 관계적인 어려움이 생기게 되었다.
짧으면 일주일, 길면 한두 달씩 여러 번 해외 생활을 해 봤지만, 장기 거주는 처음이었던 우리는 세상에 갓 태어난 신생아와도 같았다.
불안함과 예민함, 초긴장 상태의 연속 안에서 오가는 말과 행동은 서로 간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안성맞춤이었다.
쌓여가는 오해와 풀리지 않는 답답함,
아이를 양육하는 환경에 있어서 또한 예견하기 어려운 안전에 대한 불확실성을 계속 품고 있기에는 버거웠다. 출산이 가까워질수록 느껴지는 현실적인 두려움을 안고 우리는 4개월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에서 제왕절개로 둘째를 출산하고, 산후조리를 마친 후 오랜 교육 동기와 동료의 지속된 제의로 제 3국으로 출국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우리 부부는 아이는 둘, 낯선 사람, 낯선 나라, 낯선 기후에 다시 적응해야 했고, 건강을 위해 고군분투해야 했다.
적응하고, 먹고 사는 것이 우리 일이었다.
활달한 성격을 가지고, 활동을 좋아하는 나는 관계적으로 단절된 생활을 지속해야 했고, 아이를 양육하고, 가족을 먹이는 일에만 집중해야 했다.
자녀를 양육하고, 가정을 세우는 역할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나 자신은 고립되었다는 느낌이 더
크게 느껴졌다.
그리고, 뒤늦게 알게 되었다.
함께 했던 동기, 동료,
오랜 시간을 알고 지냈지만
함께 하지 못한 세월 동안
각자의 위치에서
경험한 삶으로 인해
서로가 기억하는 서로는
과거의 서로였다는 것을,
우리는 오랜 시간을 알고,
그리워하며 지냈지만
서로의 삶을 살아낸 시간만큼
많이도 달라져 있다는 것을 말이다.
우여곡절의 시간, 1년을 그곳에서 생활하고 영주권을 받기 위해 한국에 왔다.
영주권 승인을 기다리던 중 남편 영주권이 거부되어 예정에 없이 우리 가족은 한국에 정착하게 되었다.
우리는 자원봉사자라는 직업군에서 완전히 멀어져 아무것도 아닌 일반인이 되었다.
일반인이 된 나와 남편은 먹고사는 일을 위해 닥치는 데로 일을 해야만 했다.
남편은 졸지에 운전사가 되었고, 나는 이곳에 소재한 협동조합에 조합원이 되어 시급 6,000원도 안 되는 일을 했다.
2019년도에 저런 임금이라니 믿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사회생활이 처음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고, 그 일을 통해 좋은 사람이라는 귀한 열매를 얻었다.
없는 재정에 아껴가며 새로운 운동도 배웠고, 각종 자격증을 취득하며, 끊임없이 공부했다. 시도했고,
실패도 했고, 나름대로 성취도 했다.
경력이 없어서, 아이들이 어려서, 지금은 어쩔 수 없어서,
다양한 핑계를 뒤로하고 나는 할 수 있는 일을 했고, 내가 갈 수 있는 길을 갔다.
이곳에서는 과거에 나름 보기 좋은 이력이나 누가 들어도 괜찮은 학벌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인맥이 중요했다.
좋은 의미로는 모든 일은 관계에서 비롯된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렇게 걷고 또 걷는 길에 함께하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나를, 내 삶을 지지하는 진심이 느껴지는 사람들,
그들과 나의 연결고리는 직업, 돈, 수려한 외모도 아니었다.
가치였다.
각자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공유되는 공동체였다.
아이를 양육하는 태도, 교육관, 가치관,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갖추어야 할 감성적인 소양,
함께하기를 바라는 마음,
서로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한결같은 사람들이다.
마흔이 되어 아이들도 적당한 성장 시기에 접어들게 되면서 진지한 고민? 같은 것을 하게 되었다.
내 삶의 원동력인 가치를 추구하며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어디일까?
나에게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지 내 마음을 깊이 들여 보았다.
그것은 대단한 돈을 벌거나,
높은 지위에 오르거나,
많은 이들에게 촉망받는 일이 아니었다.
어쩌면 지극히 소박했다.
나 자신의 열정을 들일 수 있는 작은 일과 공간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 아이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줄 수 있는 힘이 남아있는 엄마
글을 쓸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갖는 하루
그쯤이면 충분했다.
가치를 찾고 나니 마음속 열정이라는 장작에 불씨가 떨어져 타오르기 시작함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