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

by 와타사와

정식 시합에서 단 한 번도 매트에 등을 내주지 않았던 사나이는 차가운 주검이 되어 조그마한 관에 영원히 등을 뉘었다.


다큐멘터리가 한때 온 세상을 흔들며 기후 변화 대응 운동에 불을 붙였지만, 이제 그 불꽃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반대 세력의 강력한 반격과 기득권의 교묘한 방해, 그리고 대중의 피로감이 쌓이며 운동은 힘을 잃었다. 사람들은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갔고, 뉴스에서는 더 이상 기후 변화를 이야기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경제적 문제와 일자리, 정치적 논란과 여러 가지 가십이 새로운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그룹은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는 자신들의 현실을 목도하며 절망감에 빠졌다. 그들이 일으켰던 운동이 한때는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물결처럼 보였지만, 이제는 사그라지는 파도처럼 힘없이 흩어지고 있었다. 그들의 노력이 무의미해지는 순간, 그들이 믿었던 모든 것이 흔들렸다.


그리고 그들은 하야토를 잃었다. 그는 그렇게 죽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그들의 절망이 깊어질 즈음, 한 소녀의 죽음은 너무도 갑작스럽게, 그리고 고요하게 찾아왔다. 그녀는 한때 많은 사람에게 희망의 상징이었고 저항의 변주였다. 2053년의 미래에서 리사는 아무런 징후와 기미도 없이 2025년의 지구로 왔고, 도착하자마자 다시 사라졌다. 아니 사라지기 위해 도착했다. 너무도 비극적인 등장이었다. 살아서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리사는, 자신의 죽음을 그토록 선명하게 세상에 드러냈다. 온 세상이 충격을 받았다.


소녀의 죽음 소식이 전해진 그날 아침, 진우는 뉴스를 확인하다가 휴대전화를 떨어뜨렸다. 그의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버렸고, 심장은 마치 벽에 내리꽂히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그는 수없이 많은 거래와 협상을 거쳤던 베테랑 뱅커였고, 죽음을 무릅쓰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여행을 위해 타임머신에 승선했지만, 이 순간만큼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정말 몰랐다. 깊은 무력감 속에서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너무나 충격적인 죽음이었다.


아스트리드는 소녀와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흐느꼈다. “힘들면 언제든지 말해. 네가 꼭 잘해야 할 필요는 없어.”라고 했던 자기의 말이 얼마나 공허하게 느껴졌을지, 그녀는 그 말을 떠올릴 때마다 숨이 막혔다. 아스트리드는 자신의 예술이 이 소녀를 지키지 못했다는 생각에, 오히려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생각에 무거운 죄책감을 느꼈다. 자신의 고집과 집착이 이런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 것이라 자책했다. 그녀는 리사를 중심으로 한 다큐멘터리의 짧은 추가 편집본을 만들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 작업을 계속할 자신이 없었다. 더 이상 리사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었다. 자신들의 무능 때문에 리사가 그런 결심을 했다고 생각하니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신이 마치 헤어 나올 수 없는 저주에 빠진 사람인 것 같았다. 아스트리드는 극도로 절망했다. 리사가 목숨을 던져가며 자신들을 도와주려 했지만, 아스트리드는 무력했다. 이제 그녀도 리사 곁으로 가고 싶었다.


소녀의 죽음은 그룹에 큰 충격을 주었고, 그들은 각자 자기 내면으로 깊이 가라앉아 나름의 방식으로 이 비극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포기하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해 리사 자신은 앞으로 더 나아가지 않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리사의 죽음을 헛되이 할 수는 없다.


진우는 사무실에서 밤늦게까지 홀로 앉아 소녀의 다큐멘터리를 반복해서 보았다. 화면 속의 소녀는 언제나 무표정하게 희망을 이야기했지만, 그 희망은 끝내 그녀를 구원하지 못했다. 진우는 자신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모든 순간이 허망하게 느껴졌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의 결단과 노력이 모두 허상에 불과했다는 자괴감에 휩싸였다. 리사를 위해 일어서려 했지만, 너무 힘이 들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었다.


그룹의 상실감과는 달리 세상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리사의 죽음은 마치 예수의 희생과도 같이 다가왔다. 인류와 지구를 구하기 위해, 그녀는 그들의 죄를 대신하여 죽음으로 나아갔다. 모든 이들이 미안함과 혼란에 휩싸였다. 뭔가 해야 할 것 같았지만, 그 '뭔가'는 너무 막연해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현상을 유지하려는 관성에 몸을 맡길 뿐이었다. 비극적인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잘 알지만, 지금 당장의 불편한 변화를 맞이할 용기는 부족하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본성, 인간 삶의 섭리일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게 되어 있고, 계속 그렇게 살아가며, 결국 그러한 결말과 맞닥뜨리고 말 것이다.


그룹은 절망 속에서 서로를 찾아갔다. 진우는 아스트리드를 찾아가 술잔을 기울였고, 레이첼은 알리아와 긴 대화를 나누었다. 하야토는 이제 그들 곁에 없지만, 평소처럼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각자 소녀의 죽음 앞에 치유할 수 없는 큰 상처를 입었지만, 그 상처는 그들을 다시 한자리에 모이게 했다. 그들이 겪은 비극은 모두에게 깊은 상흔을 남겼지만,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통해 다시 일어서고자 했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소녀의 죽음이 그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명확했다. 그들은 포기할 수 없었다. 소녀는 더 이상 그들과 함께할 수 없지만, 그녀의 희망은 여전히 그들 곁에 살아 있었다. 그 희망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다시 일어서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소녀의 희망이 자신들의 손을 통해 다시 세상에 닿을 수 있도록 해야 했다. 힘들어도 다시 일어서야 한다. 언제까지 소파에 몸을 파묻고 울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진우는 자신의 모든 경험과 남은 인맥을 총동원해 새로운 전략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아스트리드는 후속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한 준비에 돌입했다. 여전히 불안정해 보이는 그녀를 모두가 걱정했지만, 아스트리드는 일에 몰두하며 슬픔을 이겨내겠다고 다짐했다. 레이첼은 연구를 재개하며, 다시 닥쳐올 절망과 실패에 대비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시간이 많지 않다고 느꼈다. 알리아는 남은 아이들이 있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하야토는 아마도 리사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고 있을 것이다. 꼭 그랬으면 좋겠다.


그들은 소녀의 죽음을 헛되이 만들지 않기로 결심했다. 다시 일어서고 싸워나가는 것이야말로 그녀의 희생에 대한 가장 확고한 응답이었다. 여전히 그들의 싸움은 고되고 위태로웠지만, 끝날 것만 같았던 싸움은 가까스로 다음 라운드로 넘어갔다. 그들의 여정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고, 포기란 없었다. 그들은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기로 결심했다.


다시 마주한 자리에서, 소녀의 미소가 아련히 떠올랐다. 그녀는 더 이상 그곳에 없었지만, 그들의 마음속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룹은 서로의 손을 맞잡고, 함께 울었다. 그 눈물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작은 불씨가 되어 타올랐다. “이제 더는 울지 말자.” 나지막한 속삭임이 그들의 결심을 다잡았다. 그들은 소녀가 바라던 미래를 향해 다시 발걸음을 내디뎠다. 비록 끝내 승리하지 못하더라도, 그렇게 싸우며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또 다른 본성이리라.


변화시킬 수 없고 언젠가 절망에 빠질 것을 알면서도, 그들은 매일같이 앞으로 나아간다. 우리는 그렇게 살도록 만들어진 존재들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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