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은 다시 일어서기로 결심한 후, 각자의 방식으로 기후 변화 대응 운동에 다시 불씨를 지피기 시작했다. 예전보다 자주 함께 모여 대화를 나누고, 억지로라도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서로를 다독였다. 이제 그들은 네 명뿐이었다. 늘 포기하지 않는 진우는 ‘리사 재단’을 설립해 기후 변화 대응을 위한 자금 유치와 세력 확대에 매진했고, 더 큰 영향력을 꿈꾸었다.
아스트리드는 온라인 스트리밍 방식으로 개봉할 후속 다큐멘터리의 편집에 몰두했다. 겉보기엔 일에 집중하는 듯 보였지만, 그녀의 내면은 다른 고민으로 어지러웠다. 아스트리드는 그룹이 미래에서 2025년으로 되돌아오는 과정, 타임머신을 제작하고 탑승하는 장면을 몰래 촬영했던 영상을 공개할지에 대해 갈등하고 있었다. 동료들과 상의하면 분명 반대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막상 영상을 공개한 후에는 결국 그들도 이해해 줄 거라고 믿었다. ‘동의가 아닌 이해를 구하리라.’ 그룹이 미래에서 왔다는 사실이 드러난다면, 이 싸움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라 생각했다.
알리아는 일관된 그녀만의 방식으로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키고, 아이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변화를 만들고 있었다. 반면, 레이첼은 점점 연락이 닿지 않는 일이 많아졌다. 동료들은 그럴 때마다 긴장하고 걱정했지만, 그녀의 부재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연락이 닿았다 끊기기를 반복하던 레이첼은 중요한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며 동료들에게 미안함을 전할 뿐이었다.
그들이 다시 활동을 재개하자, 반대 세력은 더욱 치밀하고 강력한 반격을 준비했다. 리사의 죽음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고 그들을 긴장하게 했다. 그들은 자신의 권력과 이익을 지키기 위해 모든 자원을 동원해 기후 변화 대응 운동을 완전히 무너뜨리려 했다. 더 이상의 변수를 만들지 않으려고 했다.
대중매체를 통한 본격적인 비방전이 다시 가열되었다. 주요 방송사와 신문은 아스트리드의 후속 다큐멘터리를 과장된 가짜 뉴스로 묘사하며, 소녀의 죽음마저도 다큐멘터리 제작진의 성공을 위한 과도한 압박에서 비롯된 일탈로 몰아갔다. 일부 유튜버들은 리사가 실존 인물이 아니며, 그녀의 죽음 또한 꾸며낸 이야기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이 눈으로 지켜본 그 충격적인 사실마저 세차게 흔들었다. 그들은 소녀의 이미지를 왜곡하고, 사람들의 감정을 교묘히 조작했다. “그들은 그녀를 팔아넘겼다”는 비난이 거세게 쏟아졌고, 주인공들은 순식간에 거짓과 음모의 주범으로 비춰졌다. 진실을 말하려는 그들의 목소리는 악의적인 선동과 공격에 또다시 묻혀가고 있었다.
진우는 어느 날 아침, 뉴스 헤드라인에 실린 자신의 비리 의혹을 보았다. 그가 가장 즐겨보는 뉴스였다. 기사에는 “그가 영화 평론가들에게 뇌물을 제공했던 사실이 밝혀졌고, 곧 검찰 소환이 임박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함께했던 투자자들은 즉시 등을 돌렸고, 진우는 점점 고립되어 갔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사무실을 나와, 한동안 혼자 거리를 걸었다. 도시는 여전히 분주하게 움직였지만, 그 속에서 진우는 더 이상 자신을 찾을 수 없었다. 빌딩 숲 사이로 분주히 지나가는 사람들과 끊임없이 울리는 경적이 가득했지만, 진우에게 그 모든 것이 불투명한 유리 벽 너머의 풍경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였는지를 절감했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선한 목적을 위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결국 그의 선택은 오판이었음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아스트리드는 과거로의 귀환 과정을 담은 새로운 영상을 조금씩 완성해 나갔다. 후반부를 수정하던 그녀는 리사의 죽음 또한 담담히 다뤘다. 리사의 얼굴을 마주하는 일은 여전히 아스트리드에게 깊은 고통을 안겨주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극복해야만 했다. 아스트리드는 진실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 리사의 목소리를 영상 속에 그대로 남겼다. 소녀의 말투, 표정, 그리고 그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가 남긴 말들은 아스트리드에게 여전히 날카로운 칼날처럼 다가왔지만, 그 아픔이야말로 진정한 현실을 증명하는 힘이 되어야 했다. 아스트리드는 리사의 목소리가 사람들의 마음에 닿길 바라며, 그 진실을 세상에 내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는 중에도 아스트리드에 대한 공격은 끊이지 않았다. 방송과 신문, 인터넷에는 “그녀는 예술가가 아닌 사기꾼이다”, “감정을 조작해 사람들을 속인다”, “마녀다”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우울감이 극에 달했으나 아스트리드는 흔들리지 않고 작품의 마무리 작업에만 몰두하려 처절히 노력했다.
어느 날, 추가 인터뷰를 마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온 아스트리드는 충격적인 광경과 마주했다. 그동안 촬영하고 편집한 모든 필름과 파일이 감쪽같이 사라진 상태이었다. 그녀는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으며 경찰에 전화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절차에 따라 성실히 수사하겠다”는 차가운 관료적 응대뿐이었다. 아스트리드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듯한 공허함 속에서 텅 빈 작업실에 홀로 앉았다. 모니터 화면에 비치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바라보며, 그녀는 끝내 무너져 내렸다. 모든 것이 사라진 그 공간에서, 그녀의 열정과 희망도 함께 지워져 버린 것만 같았다.
레이첼이 개발한 새로운 타임머신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그녀는 하루, 그리고 이틀, 반복적으로 짧은 시간 회귀와 복귀에 성공했다. 예전과 달리 시간 여행에는 더 이상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하지 않았고, 시간 여행을 시작한 시점으로 정확히 돌아올 수 있었다. 첫 실험을 혼자 감행했던 그날의 두려움이 아직도 생생했다. 이론적으로는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혹시라도 다시 돌아오지 못해 동료들을 2025년에 남겨두고 홀로 떠나버릴 수 있다는 생각에 계기판을 조작하던 그녀의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렸었다. 너무나 두려웠지만, 레이첼은 결단을 내리고 모험을 감행했다. 그리고 그 모험은 성공했다.
이제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조금 더 연구를 진행하는 것뿐이었다. 다음 시도에서 그녀는 리사를 만날 것이다. 그다음은, 하야토였다. 레이첼은 다가올 재회를 떠올리며 긴장과 기대가 뒤섞인 복잡한 감정 속에 빠져들었다. 그녀는 과거로 돌아가 동료들과,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알리아는 더 많은 사람에게 기후 변화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사실 기득권에게 알리아는 별로 중요한 인물은 아니었다. 알리아의 신념과 달리, 그들은 교육이나 의식의 개선, 점진적 변화를 잘 믿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집요했다. 보수 단체들은 그녀의 교육 프로그램을 맹렬히 비판하며 이를 중단시키려 했다. 그들은 알리아의 프로그램이 아이들에게 불필요한 공포와 불안감을 심어준다고 주장하며, 그녀의 교육이 편향되었다고 몰아세웠다. 학교와 교육청에도 압력을 가해 알리아의 프로그램이 허가되지 않도록 방해했고, 점점 더 많은 학교가 그녀의 접근을 거부했다.
알리아는 비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았지만, 부모들은 논란의 중심에 자녀가 서기를 원치 않았다. 그녀의 진심과 열정을 이해하고 신뢰한 것은 아이들뿐이었다. 아이들은 알리아의 수업을 통해 변화의 목소리를 배우고 있었지만, 어른들의 세계는 그녀의 노력을 점점 더 고립시키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리아는 아이들의 눈빛에서 희망을 찾으며, 포기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반대 세력의 반격은 치밀하고 교묘했다. 어쩌면 그룹과 미래인들에게 그럼 치밀함이 더 절실히 필요했으리라. 그들은 주인공들의 활동 영역을 하나씩 찾아내어 무너뜨리며, 대중의 시선을 교묘하게 돌리려 했다. 그들의 전략은 사람들을 혼란스럽고 피로하게 만들고, 기후 변화에 대한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이 뻔하고 반복적인 방해는 언제나처럼 조금씩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진우, 아스트리드, 알리아, 그리고 레이첼. 그들은 모두 상처를 쌓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포기할 수 없었다. 기득권의 방해가 얼마나 강력한지 절감할수록, 그들은 더 단단해져야만 했다. 다시 마주 앉은 자리에서, 그들은 서로의 눈을 마주 보며 결심을 다졌다. 물러설 곳은 없었다. 가시밭길이 눈앞에 펼쳐져 있더라도, 단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과거의 실패와 상처를 뒤로 하고, 이제 그저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그들은 아둔하게도 언제든 다시 싸움의 한복판으로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리사의 죽음조차도 세상을 구원하지 못한 것이라는 냉혹한 진실을. 그들의 노력과 희생이 더 나은 미래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들은 오래전에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그것이 어쩌면 무의미할지라도, 그들은 끝까지 싸울 것이었다. 그게 인간의 숙명이니까...
다음 날, 뇌물공여 혐의로 진우에 대한 구속영장이 청구되었다. 충격적인 소식은 아스트리드에게 또 한 번의 깊은 상처를 남겼고, 그녀는 결국 마음의 병을 앓기 시작했다. 그녀는 침묵 속에 스스로를 가두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스트리드의 공허한 눈빛을 지켜보던 레이첼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음을 느꼈다. 모든 것이 무너지는 듯한 상황 속에서, 레이첼은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녀는 아스트리드의 손을 잡고 애써 말을 건넸지만, 그 대답 없는 눈빛은 그녀의 결심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더 이상 물러설 곳도, 기다릴 시간도 없었다. 이제 레이첼은 그들의 마지막 희망을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시작하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