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렸다. 당연했으나 이제는 당연하게 보이지 않는 잿빛 하늘 아래, 크고 묵직한 빗방울들이 쉴 새 없이 도시를 두드렸다. 워싱턴의 거리에는 우산도, 비옷도 없이 걷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람들은 우산 속에서조차 젖은 신발을 끌며 무기력하게 걸었고, 빗물은 그들의 발목을 따라 올라왔다. 그들의 얼굴은 서로를 의식하지 않았다. 마치 투명한 유리 벽 너머로 보는 듯, 아무런 생기 없는 눈동자들이 희미하게 깜빡일 뿐이었다. 네온사인은 꺼져가고 있었고, 몇 년째 고장 난 신호등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장애물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존 맥케이브의 죽음은 한 달 전이었다. 그가 이 세상을 떠난 순간, 사람들은 무언가가 끝났다는 걸 알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남은 인간적인 희망이었고, 그의 죽음으로 어떤 것이 멈추는 듯한 순간을 가져왔다. 세상이 한순간 조용해졌다. 하지만 그 조용함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몇 시간 뒤, 기계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냉혹하고 무자비하게.
존은 공허 속에 허무하게 삼켜졌다. 세상이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데에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적응과 익숙해짐의 동물이었고, 그들의 삶에는 그를 추모할 여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인류는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무너지고 있었고, 개인의 상실은 이제 더 이상 큰 의미를 갖지 않았다.
제라드 칼하운 부통령이 존의 자리를 승계했다. 사람들은 한숨을 내쉬며, 동시에 안도했다. 그들이 안도한 이유는 단 하나, 적어도 정치적으로는 무언가가 굴러갈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세상이 이렇게 그냥 끝나버리지는 않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 사실 그가 어떤 인물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무언가가 ‘계속되고 있다’는 그 사실이었다. 혼란 중에도 안정감을 찾으려는 사람들의 집착은, 그가 누구이든, 어떤 방식으로든 나아가는 것을 용납하게 했다.
제라드 칼하운은 존 맥케이브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이다. 존이 인류의 미래를 위하면서도 도덕성과 인간애를 버리지 않았다면, 제라드는 그 모든 것을 뒤로한 채 오직 '현실'만을 바라보는 인물이었다. 그가 믿는 것은 원칙이 아니었다. 이념도 아니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실용성', 그리고 '국익'이었다. 그는 차가운 현실 속에서 계산하고, 그 계산이 맞는다면 어떤 수단이든 취할 수 있었다.
"우리는 더 이상 선택할 수 없습니다."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그는 그 사실을 냉정하게 선언했다. 그의 말은 마치 미리 짜인 각본처럼 '기계'적이었고, 목소리는 무미건조했다. 그는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이 들어야만 하는 말을 했다. 마치 진실을 짊어질 수밖에 없는 숙명을 가진 사람처럼.
그날 그가 연설을 시작한 순간, 모든 사람이 그가 제시할 해결책을 기대하며 숨죽였다. “우리에겐 시간이 없습니다.” 제라드 칼하운은 말끝을 길게 늘이지 않았다. 차분하면서도 강력한 목소리가 마치 벽을 때리는 듯 도시 전역에 울려 퍼졌다. 그의 눈빛은 싸늘했고,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는 단호하게, 오로지 사실만을 말하는 듯했다.
“슈퍼노바가 제시한 대안과 백신 프로그램은 인류의 생존을 위한 최후의 수단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감정이 배제된 목소리였다. “이 프로젝트가 성공하려면, 전 세계가 협력해야만 합니다. 모든 인간이 백신을 접종해야 합니다.” 칼하운은 잠시 말문을 닫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렇지 않으면, 지구는 더 이상 우리에게 살 곳을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이 말을 마치 운명처럼 읊었다. 그리고 그 순간, 누군가는 불안에 몸을 떨었고, 누군가는 조용히 그 말에 수긍했다. 그의 말속에는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 확신이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칼하운의 선언은 단호했고, 그 단호함은 사람들의 마음에 균열을 일으켰다.
“백신은 선택이 아닙니다. 그것은 생존의 필수 조건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차갑게 울렸다. 그러나 그 목소리 뒤에는 조용한 강요가 있었다. 백신은 선택이 될 수 없었다. 그것은 곧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백신을 맞지 않으면 지구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관념이 사람들 사이에서 서서히 자리 잡아갔다. 더 이상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고민할 여지도 없었다. 그들의 선택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아니다. 많은 사람이 불안과 분노를 내면 깊숙이 품고 있었다. 백신 접종이 인류의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이라고는 하지만, 그 말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과거 코로나 사태 때 경험했던 상처가 아직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 있었다. 당시 백신 접종 후 부작용을 겪었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고, 그들의 고통은 단순한 육체적 고통을 넘어 정신적인 트라우마로 자리 잡았다. 이번에도 그 비슷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두려움이 사람들 사이에 끊임없이 번져나갔다.
특히 그들 중 일부는 노골적으로 루시앙 모르티에 (Lucien Mortier)를 지지했다. 루시앙은 백신 반대 운동의 중심에 선 인물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그 어떤 정치인이나 지도자보다도 강렬하고 날카로웠다. 그는 두려움을 부추기지 않았지만, 그 두려움에 맞설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지도 않았다. 다만 사람들에게 경고했다.
루시앙은 프랑스의 정치인이고, 코로나 백신 부작용의 가장 두드러진 피해자 중 한 명이었다. 대학생 시절, 그가 백신 접종 후 겪었던 신경계 이상은 그의 남은 삶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매일 밤 극심한 경련과 통증에 시달렸고, 신체의 움직임은 점점 둔해졌다. 의사들은 대책을 내놓지 못했고, 약물 치료도 효과가 없었다. 그는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텨야 했고, 그런 고통은 수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이 경험은 단지 개인의 고통에 그치지 않았다. 루시앙의 경험은 수많은 사람에게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고통은 그가 대변하는 수백만 명의 목소리를 담고 있었다. 코로나 백신의 부작용으로 삶이 망가졌다고 느끼는 사람들, 그로 인해 일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해진 사람들. 그들은 루시앙을 통해 자신들의 목소리가 대변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겪은 고통을 내세우지 않았지만, 그가 대중 앞에 설 때마다 사람들은 그의 내면에 담긴 깊은 상처를 볼 수 있었다. 그의 눈빛은 날카로웠지만, 그 속에는 벗어날 수 없는 피로감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의 연설은 늘 차분하고 간결했다. 하지만 그 간결함 속에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우리는 겸손해지고 두려워해야 합니다." 루시앙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작은 장치가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순순히 따르는 것은 너무나 위험합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모든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그들이 말하는 대로 아무런 의심 없이 그들의 손에 생명을 맡길 수 있겠습니까? 한 번이라도 그 선택이 잘못되면 우리는 되돌릴 수 없습니다. 이번에도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과거를 되돌아보게 했다. 신뢰했던 기술과 기관이 결국은 큰 대가를 치르게 했던 그 순간들을 상기시키려 했다.
인류의 생명을 담보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테라셀이라는 작은 기계 장치. 루시앙은 그것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것은 너무도 갑작스레 우리 앞에 등장했다. 그의 말은 사람들에게 깊은 의문을 남겼다. 사람들 사이에서 공포는 서서히 퍼져나갔다. 그들이 한때 맹신했던 과학과 기술이 그들을 구원할지, 아니면 또다시 깊은 상처를 남길지에 대한 불안은 점차 커져만 갔다.
이제 세상은 두 갈래로 나뉘고 있었다. 백신 접종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들로. 거리에 나선 사람들은 이 분열을 느끼고 있었다. 백신 접종률은 계속해서 높아지고 있었지만, 반대하는 목소리도 결코 작지 않았다. 상황은 점차 혼란스러워졌고, 무력 충돌까지 발생했다. 하나의 목표를 위해 움직이던 사회가 이제는 갈등과 분열로 휩싸이고 있었다.
백신 접종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반대론자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이 너무도 이기적인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슈퍼노바가 제안한 해결책이야말로 기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유일한 방법이었고, 이 프로젝트가 시작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이 백신을 맞아야 했다. 그들은 절박했다. 반대론자들은 비이성적으로 그 절박함을 외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반대론자들은 슈퍼노바의 계획이 완벽하지 않다고 믿었다. 그들은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는 이 시스템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한 번의 작은 실수로도 되돌릴 수 없는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누구도 양보할 수 없었다.
그때 슈퍼노바가 새로운 제안을 했다. 백신이 얼마나 효과적인지, 그리고 그것이 왜 절대적으로 필요한지 증명하겠다고 나섰다. "실험을 통해 직접 보여주어야 합니다." 슈퍼노바의 결정은 냉정했다. 원숭이와 같은 동물을 대상으로 백신을 접종하지 않았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확인하는 시뮬레이션을 제안했다.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슈퍼노바는 대중에게 그 장면을 생생하게 보여주려 했다.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증명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합리적인 제안이었다.
이사벨라는 표면적으로는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자신의 양심에 따라 이미 사임했고, 그녀의 빈자리는 아직 그 어떤 사람도 대신할 수 없었다. 이제 슈퍼노바는 더욱 통제할 수 없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아무도 그 결정에 책임을 지지 않았고, 점점 더 과감한 작업을 시도하려 했다.
곧 실험이 시작되었다. 백신을 맞지 않은 원숭이들은 점차 불안에 찬 눈빛으로 실험실 안을 두리번거렸다. 그들 중 하나는 점점 불규칙한 호흡을 내뱉기 시작했고, 다른 하나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냈다. 몇 분이 지나자, 피부에 붉은 발진이 돋기 시작했다. 발작이 일어나고, 그들은 불안감에 빠진 채 미친 듯이 몸부림을 쳤다. 연구자들은 모니터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그 충격적인 장면을 지켜봤다. 호흡은 불규칙해졌고, 가끔 경련이 일었다. 숨이 차오르며, 그들은 고통스러운 소리를 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중 일부는 쓰러졌다. 심장이 멈추거나 호흡이 끊어졌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경악과 충격이 서려 있었다.
이 실험 결과의 일부가 대중에 공개되었다. 특히 범인을 알 수 없는, 유출된 실험 동영상을 통해 여론이 급반전되었다. 동영상을 통해 백신 접종의 필요성이 명백해졌다. 대중의 반응은 차갑고 냉혹했다. 이제 백신을 맞지 않는 선택은 더 이상 개인의 자유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을 죽이는 자살과 남을 죽이는 타살과 다름없었다. 슈퍼노바의 실험 결과는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이로 인해 백신 찬성론자들의 목소리는 더욱 강력해졌고, 반대론자들은 점차 궁지로 몰렸다. 그들 중 일부는 여전히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지만 소수의 목소리이다.
세상은 더 이상 같은 곳을 향해 나아가지 않았다. 인류는 자신들이 만든 기술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