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총 데이즈 (Thung Chung Days) 캐빈 크루 트레이니 일기
Prologue
바야흐로 나의 ‘통총 데이즈’를 시작하기 전에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나는 어떤 나라의 특정한 도시를 떠올릴 때면 곧 그 도시의 배경으로 한 영화나 소설이 떠오른다.
예를 들어 ‘La Boum’의 파리나 ‘노팅힐’의 런던, 혹은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의 도쿄처럼 '홍콩' 하면 ‘금지옥엽’이 그렇다. 이 영화들은 단 한 번 보고 만 것이 아니라 특정 도시가 왠지 그리워지면 버릇처럼 다시 보곤 했다. 그렇게 보고, 또 본 까닭인지 신기하게도 그 도시들과는 어떤 특별한 시간과 추억들이 생겨났다.
홍콩에 대한 특별한 인상은 ‘금지옥엽’과 시작되었다.
내게 있어 오래된 홍콩 영화 ‘금지옥엽’은 토요일을 닮은 영화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무더운 여름철, 하늘의 푸른색이 점점 덧입혀지면서 짙어 가는 초저녁이 되어가는 어느 토요일. ‘금지옥엽’은 마치 토요일의 이른 저녁처럼 마음을 들뜨게 하고 왠지 모를 기대감과 두근거리는 설렘을 준다.
언젠가 나는 이런 평을 썼다.
"마침내 꿈꿔오던 긴 여행을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앞으로 두 번의 기내식이 더 남아 있다면 그 느긋한 기분을 만끽하며 보고 싶은 영화"라고. 또 어느 누군가는 "내 인생이 110분 남았다면 볼 영화"라고 했다. 만약 내 삶이 금지옥엽을 볼 시간밖에 남아있지 않다면 난 그때 영화 ‘금지옥엽’을 보지는 않겠지만... 그 마음이 이해될 만큼 이 영화는 아주 특별하다.
영화 ‘금지옥엽’은 그야말로 홍콩 영화의 전성기 시절, 홍콩의 본토 반환을 3년 앞둔 1994년에 만들어진 영화이다. 90년대의 홍콩이 얼마나 번성했고 이국적이었으며 홍콩이라는 도시의 오묘한 매력이 가득했는지는 ‘금지옥엽’을 보면 알 수 있다. 30년이라는 세월이 무색할 만큼 잘 만든 로맨스 영화이고 나는 이 영화 속 홍콩의 모습과 주인공 한 명 한 명이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좋다.
그리고 여기 흰 드레스를 입고, 홍콩 시내를 달리는 ‘자영’이 있다.
살아가면서 달리느라 숨이 가빠 중간, 중간 멈춰 설만큼 온 힘을 다해 달려야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을까? 달리기 대회가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말이다.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 나는 그 달리는 ‘자영’에게 그야말로 홀딱 반하고 말았다.
온갖 현대적인 불빛으로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홍콩도시 한복판을 전력질주 하는 ‘자영’의 뜨거움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가장 원초적인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는 달리기, 그것도 전력질주로 표현하는 ‘자영’의 뜨거운 사랑. 게다가 그녀는 상대에게 자신의 진짜 성별을 밝히려고 여성스러운 드레스, 그것도 마치 웨딩드레스를 연상시키는 흰색 원피스를 입는다. 남자만큼 짧은 머리에 치렁치렁한 원피스를 입고 홍콩 시내를 휘저으며 온 힘을 다해 마구 달리는 ‘자영’의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사랑스러워서 언젠가는 눈물까지 흘렸던 기억이 난다.
자영은, 뛰어가는 길이 힘들다고 느껴질 때 자전거를 탔다고 상상하면서 뛰어간다.
아무리 영화 속 캐릭터라고 해도 난 이런 자영이 못 견디게 사랑스럽다. 상상 자전거를 타는 자영의 태도를 본받고 싶다.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는 이 장면을 몇 번이나 다시 보는 사이에 나도 모르게 홍콩은 ‘금지옥엽’ 속 달리는 자영처럼 태양 같고, 무더운 여름 같은 뜨거운 젊음을 간직한 도시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올해 난 홍콩의 통총이라는 지역에서 비슷한 맛을 느꼈다.
내가 경험한 통총에서의 날들은 영화처럼 해피엔딩이 아니었고 나는 영화 속 주인공 자영만큼 씩씩하거나 용감하지 못했다. 결코 달려가지도 못했다. 하지만... 나는 끝까지 걸어갔고 도망가지 않았다. 새로운 도시 풍경을 바라보며 마음이 들떴다가 좌절했고, 날아가는 비행기들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다시 꿈을 그렸다. 그렇게 내가 있던 홍콩을 사랑하게 되었다.
이제 그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려고 한다. 나의 이야기가 홍콩 시내를 달리는 자영처럼 어떤 희망을 전할 수 있다면.
나의 통총에서의 날들. 통총 데이즈.
그리고, ~영화 ‘금지옥엽’의 줄거리~ (스포일러 있음!)
여자주인공 자영은 조금은 선머슴 같은 평범한 여자다. 지나가는 누군가가 봐도 ‘학생’이라고 부를 것 같은 모습을 했다. 그리고 자영에게는 여느 평범한 사람들처럼 동경하는 우상이 있다. 그 대상은 영화 속 당대 최고의 인기가수인 로즈와 그의 연인이자 천재 작곡가인 샘.
혼자여도 외로워하는 법이 없는 자영. 양손에 손 인형을 끼고 인형들과 대화를 만들어 낸다. 인형은 자영의 좋은 친구들이다.
‘자영’은 해마다 열리는 시상식에서 로즈가 상을 받기를 발을 동동 구르며 학수고대하고, 마침내 상을 받으면 눈물을 흘릴 만큼 행복해한다.
그렇게 순수하고 평범한 자영에게 어느 날 우연히 남자로 변신할 이유가 생긴다. 로즈의 소속사에서 ‘샘’이 새롭게 키울 신인 가수를 뽑는데 내건 단 하나의 조건은 평범한 ‘보통’ 남자였던 것.
자타가 인정하는 작곡가이자 ‘로즈’의 연인인 샘. 홍콩 이름 고가명.
샘은 ‘로즈’를 최고 인기가수로 만들어냈다. 샘은 그가 키워낸 가수와 사랑에 빠지는 특징이 있다.
자영은 동경해 마지않던, 로즈와 샘을 만날 기회를 꿈꾸며 남장을 한 채 오디션에 응시하게 된다.
드라마나 스크린 속 중성매력의 남장 여자 역할의 시초는 아마 이때 홍콩 배우 ‘원영의’가 연기한 ‘임자영’부터가 아니었을까?
‘자영’은 선머슴 탈을 쓰고 있지만 사실 그 누구 보다 여성스러운 생김새를 가졌다. 남장을 하느라 부러 2:8 가르마를 타고 여기에 안경을 끼고 품이 너무 커서 다소 우습기까지 한 차림을 하더라도 그 모습이 왠지 어색하지 않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남장한 ‘자영’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우리의 히로인 ‘자영’은 완벽한 ‘보통남자’ 였기에 약 9000:1을 뚫고 남자 신인 가수에 발탁된다.
신인 가수에 뽑히기까지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홍콩의 분위기는 한없이 이국적이고 세련되고 자유롭다. 90년대에 태어난 사람이 봐도, 그 무렵의 홍콩은 너무나 멋져서 홍콩이 이토록 번성한 곳이었는지를 새삼 깨닫게 만든다. 나도 모르게 홍콩이란 곳이 참으로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이것은 영화 속 1994년의 홍콩 모습이다. 루프탑에서 춤을 추고 있다!
더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 귀여운 장면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몇 가지 장면들을 추렸다.
하나.
막 신인 가수 계약을 하고 트레이닝에 들어간 자영의 노래 연습은 바로 이렇게, 회사 건물의 옥상 난간에 걸터앉아서 한다. 아마도, 마음껏 소리 지를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이곳은 왠지 홍콩 센트럴 할리우드 거리의 어딘가 쯤일 것 같다.
다시 홍콩의 거리를 거닌다면 턱을 살짝 들어 건물의 옥상을 바라보고 싶게 만드는 장면이다.
둘.
다 큰 자영에게는 늘 함께 ‘데리고 다니는’ 어린이(정확히 어떤 관계인지 설명되지는 않지만, 함께 살지는 않으므로 사촌 동생 즈음이 아닐까 싶다.)가 있다. 난 벌써 여기에서부터 자영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뽀글거리는 파마머리에 마치 귀여운 인형 같은 애기를 업고 다니면서 퇴근하는 로즈를 기다리고, 심지어 그 애기와 함께 길거리에서 홍콩 스타의 굿즈를 팔기도 한다.
요즘 세상에 이 정도 나이로 보이는 어린이가 엄마 없이 아는 언니와 인파를 헤치며 돌아다니고, 노상 판매까지 하는 모습은 정말 보기 힘들 것이다. 게다가 자영과 꼭 붙어 다니는 귀여운 어린이(애기라고 해야 할 정도이다.)는 의외로 세일즈 실력까지 괜찮다.
셋.
신인가수의 오디션 장면 중, 화끈한 ‘로즈’의 성격이 드러나는 표현도 마치 만화영화의 한 장면 같다.
이런 몸짓은 과연 언제 해볼 수 있을까? 스트레스 해소에 직방일 듯하다.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와,
‘샘’과 기획사 식구들에게, 곱상하게 생긴 보통남자 ‘자영’은 의문덩어리이다. 신인가수에 응시한 까닭은 단순히 ‘로즈’와 ‘샘’을 너무나 동경해서 가수가 되어 함께 있고 싶다는 것.
샘이 자영에게 어울리는 곡을 쓰기 위해 자영에 대해, 특히나 자영의 개인적인 연애 역사를 물어보는데 날짜와 시간까지 줄줄 읊는 ‘샘’과 ‘로즈’의 연대기와는 정반대로 자영은 할 이야기가 많지 않다.
사실 자신이 남장여자이므로 ‘남자로서’ 말할 수 있는 ‘여자관계’가 없으며, 그동안 자영의 삶은 ‘로즈’와 ‘샘’으로만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오디션 날부터 언제 어디서든 자영을 도와주는 룸메이트인 ‘오빠’와의 끈끈한 관계는 회사 사람들에게 자영이 ‘게이’라고 의심하게 만든다.
정작 자영에게 룸메이트 ‘오빠’는 친오빠 같은 사람이다.
그런 자영에게 동성 연애자냐고 물어보는 샘.
자영은 절대 아니라고 잡아뗄 뿐이다.
그런 자영을 그래도 믿을 수 없는 샘.
게이라는 확신에 가까운 의심을 받는 가운데 자영은 신인 가수로서의 트레이닝을 받기 시작한다.
급기야는 넉살 좋게 모든 잡일을 대신해준다는 명분으로 ‘샘’의 집에 얹혀살게 된다.
샘의 집에 살게 되어 행복한 자영.
로즈와 샘이 작곡가와 가수로 만나 함께 한 지는 오래되었지만 사실 로즈와 샘의 성향은 무척 다르다.
한 집에서 살고 있지만, 층을 나누어 아래층에 살고 있는 로즈. 로즈는 샘에게 소원함을 느끼고 있었다.
샘의 집에 살게 된 덕택에 자영은 로즈와도 자연스럽게 가까워진다. 그리고 로즈에게도 자영의 성 정체성은 당장 알아내고 싶은 궁금증 1 순위이다.
자영을 유혹하기로 작정한 로즈.
로즈는 샘을 너무나 사랑한다. 자영과 이야기가 잘 통하는 로즈.
언제라도 ‘팬심’을 감추지 않는 신인가수 자영.
로즈는 자영을 더욱 유혹하지만, ‘남장여자’인 자영은 로즈의 유혹에 빠질 수 없다. 궁지에 몰리는 것을 피하고자 자신이 게이라고 말하며 비밀을 지켜 달라고 한다.
이제 자영이 남자를 좋아하는 게이라는 것을 알게 된 로즈는 자영을 여동생처럼 여기고 그들은 더욱 가까워진다.
대외적으로는 최고의 인기가수 로즈와 염문을 퍼뜨리는 핫한 신인 남자가수 자영.
그리고 여기에 홍콩의 별, 장국영이 있다.
영화에서 장국영은 지적이고 부드러우며 섬세한 매력의 작곡가 ‘샘’으로 분해서 ‘그’ 만큼이나 아름다운 노래를 몇 곡이나 부른다. 사랑스럽고 털털한 남장 여자 ‘자영’과 소년 같고 부드러운 ‘샘’은 각자의 중성적인 매력을 뽐내며 쌍둥이처럼 어울린다.
샘은 폐쇄공포증이 있어서, 엘리베이터에 갇히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고급 저택에 살지만 샘과 로즈의 아파트는 유난히도 엘리베이터 고장이 잘 나는 편이다.
자영은 늘 남장을 해야 하기에 야광봉 묶음을 바지에 넣고 다닌다. 공포감에 젖어 있는 샘에게, 자기의 야광봉을 꺼내서 샘이 두려움을 잊게 도와준다. 자영은 따뜻한 마음씨를 가졌다.
춤까지 가르쳐주면서 샘을 진정시키는 자영. 그들은 함께 즐거워한다. 보는 사람도 너무나 즐겁다.
섬세한 작곡가 ‘샘’에게 아이처럼 순수한 매력의 ‘자영’은 한없이 신선하고 편안하게 다가온다.
남자 연기도 능청스럽게 펼치는 자영. 바짓가랑이에 아예 손을 넣고 다닌다. 이 정도는 기본이다. ‘오빠’에게 자연스러운 남자 모습을 열심히 전수받았으므로.
샘의 피아노를 치고 있는 자영.
자영이 변기통 위에서 작곡한 노래의 몇 소절을 듣고서 바로 하나의 멜로디를 완성하는 천재적인 샘.
이제 샘은 자영의 멜로디를 가지고 마치 자영을 향한듯한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른다. 자영은 그런 샘에게 반하고 만다. ‘금지옥엽’ 속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는 바로 샘이 자영을 곁에 두고 피아노를 치며 노래하는 이 장면이다.
달라도 너무 달라서 맞지 않는다고 느꼈던 로즈와는 정반대의 평범한 자영에게 점점 물들어가는 샘.
샘은 자영 앞에서 안 치던 피아노를 치게 되고 음악적인 영감까지 받는다. 하지만 샘에게 ‘자영’은 남자이다.
그러나 언젠가 꼭 가보고 싶은 아프리카에 여행을 떠난다면, 이제 그의 곁에 ‘자영’이 있기를 꿈꾼다. 한 지붕 아랫집에 함께 살고 있는 연인 ‘로즈’가 아니라 말이다.
자영 역시 샘에게 푹 빠지게 되는데…
팬으로 다가와 로즈와 샘의 사이를 멀어지게 하고 있는 자영의 존재. 그런 스스로가 괴로운 자영.
로즈가 잠깐 외국에 나간 사이, 샘에 대한 깊어진 마음으로 괴로워하던 자영은... 결국 로즈에게 자신이 여자라는 것과 샘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하게 된다.
동생처럼 생각했던 자영에게 배신당하지만, 오직 샘에게서 떠나 달라고만 부탁하는 로즈.
하지만, 샘의 마음도 이미 로즈에게서 멀어져 있다.
너무나 마음이 아픈 로즈. 로즈가 샘에게 자영이 여자라는 것을 밝히지 않았는데도, 샘은 ‘로즈’와 헤어지기를 바란다.
샘과 헤어진 로즈.
사랑하는 샘의 마음을 인정하고 그런 샘을 떠나보내는 로즈.
영화 속 로즈는 정말 멋진 여자 캐릭터였다. 솔직하고 당당한 매력의 로즈는 완벽한 스타다. 로즈를 연기한 유가령의 실제 성격은 로즈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대신 샘과 로즈는 영원한 친구로 남았다.
자영은 로즈에게 자신이 여자라는 것과 샘을 사랑한다고 고백한 이후 그들에게서 떠났다. 하지만 자신이 여전히 샘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영은 눈물을 흘릴 때면 마치 아기처럼 운다.
‘오빠’는 언제나 자영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달리기로 자영을 위로한다. 슬퍼서 두 시간 내내 울다 가도 달려가서 샘을 만날 상상을 하니 이내 웃음을 되찾는 자영.
방에서 달리던 자영은 이제 샘을 만날 준비가 되어있다.
여자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자영은 드레스로 갈아입는다.
그리고 자영은 샘에게로 달려간다. 달리는 자영은 이제 시작된다.
사랑을 고백하기 위해 샘의 집까지 홍콩 시내를 전력질주로 달려온 자영.
자영은 용기 내어 샘에게 자신이 여자라는 것을 말한다.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자영을 좋아하게 되면서 자신이 남자를 좋아하는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로즈와도 헤어져 넋이 나가 있던 샘에게 자영이 먼저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샘은, 말한다. “남자든 여자든 나는 널 사랑해.”
샘과 자영은 뜨거운 키스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