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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Oct 31. 2022

조선왕과의 만남(56)

헌종릉_02


제24대 헌종 1827~1849 (23세) / 재위 1834.11 (8세)~1849.06 (23세) 14년 7개월

     

Source: Chang sun hwan/ illustrator


▐  경릉(景陵) 사적 제193호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9-2 (동구릉 내) 


헌종의 친정이 시작된 후에도 신흥 지식층이 가져오는 서양문물이 배척되고 천주교가 탄압받았다. 천주교인을 적발하기 위해 [오가작통법]을 실시하고 1845년에는 한국교회사 최초의 한국인 신부인 김대건을 처형하였다. 같은 해 영국군함이 조정의 허락 없이 제주도와 서해안을 탐색하고 돌아간 일이 있었다.


1846년에는 프랑스 군함 3척이 충청도 앞바다에 들어와 프랑스 신부를 처형한 것에 대한 항의국서를 왕에게 전달하고 돌아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조정은 청나라를 통해 프랑스에 조선최초의 외교답서를 보내게 되었다. 1848년에는 서양의 배들이 경상도와 전라도, 황해도 등지에 빈번하게 출몰하여 백성들이 크게 동요했다.  



세계는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이 혁명을 통해 근대국가를 이루고 있었고  자본주의는 노동자들의 결성과 마르크스엥겔스에 의해 공산주의 이론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미국에서는 유선통신이 만들어지고 있었고 청나라는 영국과의 아편전쟁으로 혼란을 겪으며 서구열강과 통상조약을 맺고 있었다. 


일본은 서양문물의 출몰에 대비해 수비를 강화하면서도 열강국과의 교류를 준비하는 등 국제정치에 눈을 돌리고 있었다. 헌종 조에는 서구열강의 외세(外勢)가 침범해 통상위협과 문호개방을 적극 요구했는데, 조선의 권력층은 이러한 국제환경 변화에 별다른 대응책을 적절하게 제시하지 못하고 세력 간의 권력 장악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8년간의 친정기간 동안 안동김씨와 풍양조씨의 권력투쟁에 휘말렸던 헌종은 재위기간 중에  정조순조익종의 치적을 수록한 역사서인 삼조보감(三朝寶鑑) 등을 간행하고, 각도에 강이나 계곡에 제방을 수축하는 등의 치적도 있었다. 조선의 임금 중 최고에 미남이었다는 헌종은 생전에 2명의 왕비와 2명의 후궁을 두었다.


원비인 효현왕후가 16세에 요절하자 이듬해 계비를 맞아들이기 위해 스스로 간택에 참여했다가, 내심으로 경빈 김씨를 마음에 두었다. 하지만 결정권을 쥐고 있던 대왕대비(순원왕후: 순조비) 김씨는 세력이 약했던 남양 홍씨 효정왕후를 계비로 삼게했다. 



헌종은 3년이 지나자 효정왕후가 후사를 생산할 가능성이 없다는 핑계로 대왕대비의 허락을 받아 삼간택에서 낙선한 경빈 김씨를 후궁으로 맞아들였다. 그는 후궁이 종2품 숙의에 봉해지는 관례를 무시하고 경빈 김씨를 정1품 빈에 책봉했으며, 1847년(헌종13)에는 창덕궁 동편에 별궁인 낙선재(齋)를 지어주었다. 


헌종은 젊은 나이임에도 사치는 자신을 망치고 나라를 망치는 것이라고 금기시하며 백성들을 위해 근검절약을 솔선수범했으며, 좋은 옷과 음식을 경계하고 겨울에는 무명을, 여름엔 모시를 입었다 한다. 



하지만 그는 원상(院相)들에 둘러싸인 힘없는 왕이었기에 나라 안팎으로 혼란스러운 정국을 뒤로하고 세상사의 시름을 잊고자 했던지, 세상을 떠나기 전 2년 동안 경빈 김씨와 함께 낙선재에 머물며 고금명가(古今名歌)를 벗 삼아 지내기를 좋아했었다.


헌종 조에는 국내외 주변상황이 급격히 변해가며 열강세력들이 조선으로 몰려오고 있었으나, 그는 세도정치라는 신권(臣權)에 휘둘리며 후사도 남겨놓지 못한 채 창덕궁 중희당(重熙堂)에서 홀연히 23세의 생을 마감하였다. 살아서 제대로 왕권한번 휘둘러보지도 못하고, 죽어서 조차 어색한 삼연릉에 누워있는 비운의 왕과 비(妃)의 혼령이 그나마 이곳에 평안히 머물기를 애써 기원해본다.


illustrator / 정윤정


제24대 헌종 원비 효현왕후 1828 ~ 1843 (16세)      

    

효현왕후는 김씨는 영흥부원군 김조근의 여식으로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효현왕후의 아비 [김조근]은 순조의 장인이었던 김조순과 7촌간이며 철종의 장인 김문근과는 8촌간이다. 당시 안동김씨와 풍양조씨가 세력다툼을 하고 있었지만, 왕대비 순원왕후(순조 비)의 친정 안동김씨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안동김씨 일가에서 정비(正妃)로 간택된 여인이 효현왕후였다. 그녀는 1837년(헌종3) 10세에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당시 11세였던 임금이 너무 어려서인지 헌종이 15세에 이르던 4년 뒤에야 가례를 치루고 비로소 왕비에 오르게 되었다. 



헌종의 장인이 된 김조근은 순조부터 철종 때까지 이어진 안동김씨 세도의 중심인물 이었다. 그는 1837년(헌종3) 승지(承旨)의 지위에 있다가 딸이 왕비에 오른 이후 호위대장과 어영대장 등 무반의 주요직을 맡았다. 순조 조에 정권을 독점해온 [안동김씨] 세력은 헌종의 즉위와 함께 새로 대두한 [풍양조씨] 세력에게 잠시 권력을 빼앗겼었다. 


이에 순조 비 김씨가 김조근의 딸을 헌종 로 맞아들임으로써 안동김씨 세도는 순조에 이어 철종 때까지 계속 이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효현왕후는 왕비에 오른 지 2년 만에 16세 나이로 소생 없이 병사하였다. 그녀는 안동김씨 일족의 정략에 의해 10살의 어린나이에 궁궐에 들어와 신혼의 단꿈에 젖어보기는커녕 애정(愛情)이란 의미도 모른 채 요절하고 말았다. 



조선왕실에서 10대에 요절한 왕비에는 세 여인이 있다. 세조 조에 한명회의 여식이던 장순왕후(예종 비)와 공혜왕후(성종 비)가 각각 17세와 19세에 요절했는데, 효현왕후는 16세에 병사했으니 조선왕후 중 가장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셈이다. 그녀는 이렇다 할 자신의 기록을 역사에 한줄 남기지도 못한 채 [동구릉] 경내 선조가 버려두고 간 빈터에 조용히 묻히게 되었다. 



제24대 헌종 계비 효정왕후 1831 ~ 1903 (73세) 

 

효정왕후 홍씨는 영돈령부사 홍재룡의 여식으로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헌종 원비였던 효현왕후가 죽고 이듬해인 1844년(헌종10) 14세에 가례를 올리고 왕비에 올랐다. 하지만 헌종은 마음에 없던 홍씨가 왕후가 된 뒤에도 중전 방에 들지 않고 경빈 김씨의 거처인 [낙선재]를 창덕궁 옆에 만들고 그곳을 자주 들렀다. 



조선말기 김택영의 저서 한사경(韓史綮)에는 헌종의 외가인 풍양 조씨 일가가 중전의 친가인 남양 홍씨가 세도를 부릴까 우려해 헌종과 효정왕후의 사이를 멀게 하려는 계책으로 중전 홍씨의 월경 날짜를 알아낸 다음, 그날만 헌종을 중전의 방에 들어가게 했다고 기술(記述)하고 있다. 


헌종의 사랑을 받지 못한 효정왕후는 남편이 23세의 나이로 병사하면서 19세에 청상과부가 되어 철종이 즉위하자 대비에 올랐으며, 1857년(철종8) 시조모 대왕대비 순원왕후(순조 비)가 죽자 왕대비가 되었다. 하지만 시어머니인 조대비(신정왕후: 헌종 모)에게 밀려 조용히 일생을 보냈다. 



그녀는 생전에 화초와 새를 가까이하며 헌종이 경빈 김씨와 가까이하는 것을 시기하지 않았다. 왕대비가 된 뒤에는 소생 없이 생활하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대비인 철인왕후(철종 비)와 함께 어린 궁녀를 대비전에서 돌보았었는데, 이 아이가 조선의 마지막 궁녀인 천일청(千一淸) 상궁이다.  


1890년 대왕대비인 신정왕후가 승하하자, 효정왕후는 왕실 최고어른인 대왕대비가 되었다. 이때는 철인왕후가 세상을 떠난 뒤였기 때문에 고종 비인 명성황후와 동서지간처럼 살갑게 지냈고, 항상 온화한 기색을 잃지 않았다 한다. 



1903년(고종40) 덕수궁 수인당(壽仁堂)에서 73세를 일기로 이승을 하직해 헌종이 잠든 경릉에 첫째 왕후 효현왕후와 함께 삼연릉(三連陵)을 이루어 나란히 잠들게 되었다. 살아서 남편을 가까이하지 못했던 효정왕후는 죽어서도 남편을 사이에 두고 효현왕후의 옆에 묻히게 되었으니, 가련했던 그녀의 생전 모습과 다르지 않은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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