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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돌아보면 그리움

10화. 온전치 못한 자식

by 권에스더

어린 시절 동네에는 소아마비에 걸렸던 아이들이 몇 명 있었다. 한 명은 우리 언니나이였고 하나는 내 나이였다. 아니 하나는 우리 언니 친구였고 하나는 내 친구였다. 그 시절은 나이가 같으면 친구니까.

그 당시 우리들도 예방접종을 하지 않았는데 모두 걸리진 않았다.


내 친구인 그 아이는 나랑 같이 학교도 다니고 숙제가 있으면 그 아이 집에 같이하곤 했다.

1학년 초에 한 번은 소를 그려오는 것이 숙제인데 나는 노트에다 내가 봤던 소를 생각하며 그렸다.

소 같아 보였다. 그런데 개가 "어떻게 그리냐?"라고 자꾸 그래 설명할 수 없어서 내가 그려 주었다.


조금 있으니까 개네 엄마가 점심 먹고 가라고 했는데 한양푼에 모두 같이 먹고 김치도 길게 손으로 찢어 먹는 것이 난 낯설어 싫다고 하고 집으로 왔다.


우리 집은 각자 그릇에 먹고 김치도 엄마가 다 잘라 놓지 손으로 찢어먹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엄마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그 집은 그렇게 먹는 것이 맛있다."라고 그러더라 하셨다.

집집이 식사방법도 다르구나 생각했다.


개 동생이 있었는데 오른쪽 귀가 없이 태어났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그 집을 애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짝귀 엄마"라 불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잔인한 호칭이란 생각이 든다.

그 시절 사람들이 착했는데 남에 대한 배려가 무엇인지를 몰랐던 것 같다.

그렇게 동네가 근심 없이 잘 지내다가 짝귀엄마가 병이 났다.


신장이 나빠 얼마 못 산다고들 했다.

그 시절은 혈액투석이 없었다. 그냥 저염식이 다였다.

그 집 엄마는 얼굴이 노랗게 변해갔다. 얼굴이 부었다. 어느 날 보니 손톱도 노랬다.

우리 집 뒷마당에 앉아서 이야기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신장 때문에 저염식을 하니 맛이 없어 밥을 먹을 수가 없다고 김치 한번 맛있게 먹고 죽고 싶다 했다. 그 엄마가 담근 김치는 맛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신장 이식 기술이 있었는지 모르는데 동네 사람들은 그 엄마한테 "짝귀 신장하나 받아!"란 말을 자주 했다.


그 엄마는 펄쩍 뛰며 "그건 절대 안 된다. 저렇게 낳은 것도 가슴 아픈데. 절대 안 될 일!"이라며 말을 잘랐다.


동네 사람들이 자식 때문에 아픈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 같았다.

짝귀가 그 엄마의 가장 아픈 손가락이었을 텐데 말이다. 정상인이 아니라도 귀한 생명이란 인식이 부족했던 것 같았다.

그 엄마에게 소중하고 아픈 자식이었을 텐데 그것을 배려하지 못했다.


사실 그 시절은 어린아이는 1/2인으로 생각했다.

온전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때이다.

아이를 사회적으로 그리 귀히 여기지 않았다.

그러니 다 그런 생각들을 했을 것이다.


요즘 같으면 인공연골에 피부를 입혀 귀를 만들어 붙이면 되는데 그 시절엔 그게 큰 흠이었다.

그 아이를 따라다니는 나쁜 꼬리표였다.


그 아줌마는 소원대로 어느 날 김치 한탕기에 밥을 맛있게 드시고 다음 날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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