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울타리
봄날이 끝나기 전에 강 씨 할아버지 댁으로 준기와 덕이는 이사를 했다. 강 씨 할아버지가 도배를 새로 해준 덕분에 산뜻한 풀냄새가 낫다. 무엇하나 부러울 것이 없었다. 마당 한가운데는 펌프가 있어서 물을 쓰는데 문제가 없었고, 몸이 불편한 덕이는 초원에서의 생활보다 한결 좋아진 환경이 마음을 더 강하게 다지게 만들었다. 집 구조가 똑같지는 않지만, 덕이가 살던 집 구조와 비슷하기도 해서 정감마저 들었다. 준기 또한 훨씬 가까워진 직장과 주인집 어른들이 있어서 덕이 혼자 집에 있어서 일하면서도 노심초사했던 부분들이 다소 해결돼서, 일에 좀 더 집중할 수 있게 했다. 주인집에는 전화도 있어서 급할 때는 덕이에게 연락도 할 수 있었는데, 강 씨 할아버지는 흔쾌히 전화 사용을 허락했다. 이사하던 날 덕이 엄마는 말없이 부엌 한편에서 울음을 삼켰다. 절뚝거리며 이삿짐을 나르는 덕이 손을 낚아채며, 덕이 엄마는 궤춤에 손을 넣어 돈이 든 봉투를 덕이에게 주며, 덕이의 뺨을 어루만졌다. “잘 견뎠어. 잘 살 거야, 혹시 오빠가 뭐라도 주거든 받거라. 나한테 이거 받았다는 얘기 하지 말고” 눈물을 참고 덕이의 뺨을 한동안 어루만지며 덕이 엄마는 말했다. 덕이는 엄마에게 고맙고 미안했다. 그리고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저녁이 되자, 강 씨 할아버지가 “집구경 왔어요”하면서, 문을 두드렸다. “정리는 다 됐나? 도배는 맘에 들어요?”라고 묻더니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정신없을 테니 오늘 저녁은 우리 집에서 먹읍시다.”라며 저녁 초대를 했다. 이런 호의를 받아본 적이 없고, 애 딸린 절름발이라고 세주기 싫다고 거절만 당하던 덕이로써는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사와 정을 느꼈다. ‘이제 내 몸만 건강해지면, 우린 보란 듯이 잘 살 거야.’ 덕이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특별히 고기까지 구워주신 강 씨 할아버지는 준기와 덕이가 밥을 한 숟가락 씩 뜰 때마다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며칠이 지나고, 결혼하고 처음으로 준기 친구와 회사 동료들을 초대해 집들이도 했다. 처음으로 집에 지인들을 초대한 준기는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덕이 또한 이런 기쁨이 준기에게 오래 지속되길 바라며, 손님 대접을 열심히 했다. 이 자리에는 강 씨 할아버지를 소개해 준 김 상사도 있었다. 김 상사와 강 씨 할아버지는 어떤 사이인지 무척 친해 보이기는 했으나, 김 상사는 강 씨 할아버지와의 관계를 준기에게 말해주지는 않았다. 김 상사는 강 씨 할아버지께 준기 내외를 잘 부탁드린다고 말하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기가 불편하지 않게 다시 오마, 얘기하고 그렇게 준기 집을 나섰다. 덕이 오빠는 끝내 찾아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덕이 오빠는 덕이 동생에게 돈을 들려보내며, 엄마가 주는 것이라며 전하라고 했다. 그렇지만 덕이는 오빠가 보낸 것을 알았다.
백군은 초희와의 만남이 잦아졌다. 가끔 초희의 톡톡 튀는 행동이 부담스럽긴 했지만, 같이 있을 때는 마법처럼 시름을 잊기도 했다. 봄이 끝나갈 무렵, 초희는 갑자기 물었다. “ 나 어때요?” 백군은 당황하며 “네?”라고 되묻자, “나 어떻냐고요? 예뻐요? 스타일은? 맘에 들어요? 내가?” 쉴 새 없이 질문을 쏟아 냈다. “네에, 초희 씨는 예쁘죠.”라고 백군이 말하자. “그럼, 나랑 결혼할래요?” “뭐 남자만 청혼하란 법 있나요? 자존심은 좀 상하지만” 갑작스러운 청혼에 백군은 당황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정말 이 여인을 사랑하는 걸까?’‘아니, 사랑할 수 있을까?’ 잠시 생각에 빠진 사이, 초이가 버럭 화를 냈다. “싫으면 싫다고 말씀하세요. 나도 인기 많다고요.”하며, 훽 돌아서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떠나고 있었다. 백군은 화들짝 놀라서 뛰어가 초희의 어깨를 잡아챘다. 그리고 거칠게 초희를 끌어안았다. 초희는 당황했지만, 그대로 몸을 맡긴 채 백군의 시간을 허락했다. 포옹을 끝내고 초희의 양어깨를 잡고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백군은 “정말, 나랑 살래요?”“날 사랑할 수 있나요?”라고 물었다. “사랑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사랑하고 있어요.” 초희가 대답했다.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다 백군은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 결혼하자고 얘기하고 날을 잡아 양가 부모님을 만나자고 했다. 초희와 백군은 서울에 계신 각자의 부모님께 이 소식을 전했다. 초희의 부모가 이것저것 궁금하고 걱정이 많은 것에 비해, 백군의 집에서는 반기는 분위기였다.
여름이 되자, 덕이의 몸은 조금 더 좋아지는 모습이었다. 영이 살이 붙고 옹알이가 늘어 주인집에서도 인기 만점이었다. 강 씨 할아버지 내외는 몸이 불편한 덕이를 도와주려고 영을 봐주곤 했지만, 점점 더 아기의 재롱에 빠져들곤 했다. 어떤 날은 덕이와 준기가 깨지도 전에 문밖에서 영을 데려가려고 기웃거리기도 했다. 뜨거운 여름은 하나도 뜨겁지 않았다. 준기의 회사 생활도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강 씨 할아버지 내외는 준기네가 정말 친자식 같은 느낌으로 정을 나눠 주었다. 아버지의 정을 받지 못한 준기는 강 씨 할아버지를 아버지처럼 따르곤 했다. 가을을 지나며 모든 것이 빠르게 안정을 찾아갔지만, 덕이의 왼쪽 다리와 팔은 끝내 마비 증상이 풀리지 않았다. 부자연스러운 왼손과 마치 소아마비를 앓은 것처럼 다리를 절었다. 어떤 때는 심하지 않아 보였지만, 외쪽 다리는 끄는 듯한 모습으로 걸어야만 했다. 덕이는 걸어서 장도 보고 대인 기피증도 잘 극복해 냈다. 가을이 깊어 갈 무렵 영은 돌이 되지도 전에 걷기 시작했다. 덕이와 준기는 영의 돌잔치를 가능한 식구들을 모두 불러 성대하게 하고 싶었다. 덕이의 체력으론 둘 사이엔 영이 유일한 자식이 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리저리 들뜬 가을은 그렇게 찬바람을 마중하고 있었다.
마침 졸업반이던 초희는 가을이 되기 전 학기를 마치고 귀국할 준비를 했다. 백군의 미국 생활도 마치 때가 됐다는 듯 본사 발령이 났다. 때를 맞춰 함께 귀국한 백군과 초희는 양가를 인사차 방문하기로 했다. 백군이 먼저 초희의 부모님을 뵙기로 했다. 백군의 차분하고 듬직한 모습을 보고 초희 부모님은 안심하는 모습이었다. 초희의 아버님은 은퇴를 했지만 법조인 출신이었고, 초희는 집안의 막내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어리광이 심하다 싶을 정도로 떼를 쓸 때가 있지만, 백군이 보기엔 귀여운 정도로 보였다. 초희의 부모님은 철없어 보이기만 하던 초희가 듬직한 사윗감을 데려온 것에 만족하고 기특했다. 초희부모님을 만난 다음 주에 백군은 초희를 자기 부모님께 소개했다. 백군의 부모님은 초희의 집안과 밝은 초희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처음 봤을 때는 덕이와 너무 닮아서 화들짝 놀라기도 했다. 그래서 백군을 따로 불러 어떤 마음인지 물었다. 백군은 그냥 초희가 마음에 든다고 했다. 전혀 다른 성격이고 발랄한 초희의 모습은 차분한 백군을 잘 이끌어 줄 것으로 기대도 되었다. 한 달 뒤 갖게 된 부모님 상견례는 양가 모두 흡쪽하게 마무리 됐다. 돌아오는 봄에 결혼식을 하기로 하고 두 사람은 각자의 귀국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초희는 하얀색 자가용을 몰고 백군을 만나러 갔다. 놀라서 쳐다보는 백군에게 “아빠한테 졸라서 샀어요. 자기 같은 사윗감 데려왔다고 아빠가 허락했죠.”라며 배시시 웃었다. 백군을 옆에 태우고 “아직 초보니 각오 단단히 하세요.”라며 차를 몰았다. 그렇게 이들의 차창으로도 초겨울 바람이 열기를 식히며 불기 시작했다.
- 닮은 사랑 -
내 사랑은 닮았어요
그렇지만 새롭죠
다른 사랑은 필요 없어요
나에겐 이 사람뿐이죠
새 사랑이 와도
내 사랑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죠
언제나 그 자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