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심 (初心)

절박함의 방 속에

by 김가희


그래도 나는 현실을 다르게 상상해 보고 싶었다. 삶을 삶으로부터, 시간을 시간으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했다. 아마 이것은 매우 어려우면서도 간단한 일일 것이다. 그저 처음의 마음을 되찾으면 된다.


그런 마음이 있다. 모든 것을 벗어던진 곳에서, 오롯이 나만의 공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 그 속에서 일생을 나고 싶은 그런 마음. 어떠한 해명도, 잘 살아내고 있다는 증명도 필요 없는 곳. 눈 뜨는 순간 나만의 색으로 하루를 보내고, 소음 없이 잠들 수 있는 날.



움직임의 동기는 단순하다. 그저 알고 싶다는 궁금증으로, 이유 없는 좋아함으로 충분하다. 성취 없이 무너지지 않고, 말 없는 시간 속에서 소외되지 않는 상태.


과연 이것이 지속 가능한가에 대해 의심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이러한 질문은 이미 내가 그 감각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언젠가 아주 짧게나마 맛본 적 있는 평온함이 나를 다시 이끌고 있다는 것이다. 아직은 멀리 이탈하지 않은 채 그 궤도 안에 머물고 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방향이다. 원점에서 첫 쏘아 올림을 시작한 그 방향. 어쩌면 그것을 유지하겠다는 것은 불가능을 향한 고집이 아닌, 나 자신에게의 귀환일지도 모른다.




아무에게도 아무런 책임이 없는 공포가 있다. 그 누구도 나의 의도를 모른다는 것에 대한 공포. 이 행위를 계속하는 이유에 대해 결국 아무도 묻지 않는다는 사실. 그건 언제나 초기의 방향과 조금 빗나가 있다. 처음의 마음은 말로 꺼내기 어려운 것이 되었고, 그래서 어느 순간 누구에게도 전달된 적이 없었다.


간혹 일 자체가 나를 삼켜 버리는 순간이 온다. 성과도 마감도 잊고, 손이 앞질러 움직이며 시계가 무음이 되어 버리는 시간—그때 문득, 처음의 마음이 스쳐 간다. 아마 그날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설명 불가능한 끌림에 떠밀려 궤도에 올랐고, 그 궤적이 이 순간까지 끈질기게 이어졌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이런 시간이 진실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해 줄 증인은 없다. 기록도, 전시도, 상장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질지 모른다. 스스로만 알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걸 붙잡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위태로운 일인지 문득 실감하게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그것을 반복해 삶에 각인시키는 것뿐. 외부의 보증 없이 지속되는 이 추동이야말로 가장 조용한 의무이며, 첫 발을 떼게 한 근원을 마지막까지 지키려는, 누구도 대신 짊어질 수 없는 사적인 연대다.



표층 아래엔 언어를 거부하는 원천이 숨어 있다.

결국 나는 평생 그 미완의 서사를 들고 다니며,

스스로에게만 정당성을 부여해야 한다.


처음의 마음이란 그런 것이다.

아무도 대신 증명해주지 않고,

오직 내가 계속 살아내야만 유지되는 원점.




나는 첫 장에 몰입이라는 두 글자를 적는다. 글씨가 번지기 전에 한밤의 고요가 깨지고, 엉켜 있던 생각들이 말끔히 깨어나면서 잠은 저 멀리 밀려난다. 문득 고개를 들어 보면, 펜 끝보다 마음이 먼저 앞으로 쏠려 있다. 예상치 못한 속도로 빨려 들어가는 나를, 마치 창밖 풍경처럼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보는 순간이 온다.


그런데 바로 그 ‘떨어져 바라봄’이야말로 출발점으로 돌아가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는 아이러니가 있다. 처음 길을 떠날 때 분명 하나의 중심이 있었지만,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우리는 그 중심에서 멀어진다. 다시 되돌아가려면, 열중하고 있는 자신을 잠시 멈추고 객석에 서야 한다.


관찰의 정거장에 서서 몰두의 기차를 쳐다본다. 기차가 달려가는 이유를 확인하기 위해 그곳에서 잠시 내려서 출발점을 확인해야 한다. 그 행위가 완전한 몰두는 아니지만, 이탈 없는 항로를 고치는 가장 확실한 몰입이다.


이 단순한 역설을 잊는 순간, 삶은 뿌리를 잃고 표류한다. 어찌 보면 달리는 기차는 움직임 없이 종이에 단어를 나열하는 행위만큼이나 부질없다. 그러나 기차 안의 사람들의 시선에서 기차는 유일한 희망이다. 그래서인지 인간의 절박함을 탓할 수 없게 된다.


한 번쯤은 터널 밖으로 나와 방향을 확인하는 것도 가속의 방법이 된다. 점검이 끝난 뒤 다시 나아가면 된다. 설령 지금 멈춰서 있다고 한들, 그 자리가 기차의 종착점이라면 그 또한 아름다운 도착이다. 무엇보다도, 원점을 떠올리는 그 행위는 잊히던 존재의 선명함을 되살리는 초점이 된다.




모르겠어. 시작이 어디였는지를.

도대체 어쩌다가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

이게 나의 주요 증상이야. 계속 반복되고 있어.


알고 있어. 지금 함께 있는 순간 나는 그것을 감지해.

너의 두려움. 멀리 떨어졌다는 공포감.


확실히 어떤 사람들은 이곳을 인식하지 못하겠지?

길을 잃었다는 것조차 떠올리지 못하는 방에 갇혔으니까


즉각적인 만족에 집중할 때,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시각에 답해나갈 때,

우리는 우주의 부름을 잊어.

그래서 끊임없이 왜 이곳에 내려왔는지 상상해야 해.




바로 그런 의미다.

정체된 수용체가 아니라 흘러가는 진동 속에 있는

방랑하는 곡선 속에서 뿌리를 찾으려는

우리는, 초심의 인간이다.



.

.

.

.

.


말해지지 않은 감정은 내면에 흐릅니다.

이 글은 '가희: 그럼에도 희망을 이음' 연재 중 하나로,

감각을 지나 정돈되어 가는 생의 여정을 기록합니다.

keyword
이전 20화순애 (殉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