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숨이 비워진 공간
인간은 갈수록 표현할 능력을 잃어간다. 감정은 견딤으로 환원되고, 인생은 버틴다는 말 안에 가두어진다. 언어는 더 이상 존재를 해명하는 도구가 아니라, 오직 견디기 위해 허락된 최소한의 구조가 된다.
그래서일까. 내가 품었던 방대한 고뇌는 그 자체로 이해받고 싶다는 실낱같은 욕망으로 남았다. 담을 수 없는 이 복잡한 감각을 이론도 표상도 아닌, 보다 진실에 가까운 장면으로 건네고자 했던 것. 아마도 그것은 총체적 이론과 객관적 관념을 모두 던져버린 자리에서 비롯된, 가장 솔직한 소통의 태도에 대한 갈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가 수긍하든 부정하든,
비치는 거울이 할 수 있는 일은 끝내—거짓뿐이었다.
태초에 우리는 고통이 순환하는 생태계에 들어선다. 착각과 실재가 같은 온도로 흐르는 곳, 분간 자체가 의미를 잃는 자리에서 나는 하늘과 땅을 오간다. 오로지 그 사이에만 팽배하는 외로움과 공포가 있다. 때로 인간에게서 사랑받는다는 것 자체가 전혀 가능하지 않다고 느껴졌다. 번역된 장면들을 살아내는 동안, 가능성은 늘 손 닿기 직전에서 흩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알게 되었다. 모독도, 혐오도, 폭력도 터무니없이 개인적이어서, 결국 인간의 전제가 된다는 사실을. 그 말들은 타인을 향하지만, 실은 말한 자의 결핍을 비추는 방식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상처를 ‘받지 않는’ 기술보다, 상처를 ‘반환하지 않는’ 결심을 배웠다. 멈춤으로 고통의 순환을 중단시킬 수 있다면—나는 그쪽이 되기로 했다.
이해받지 못한다는 공허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공허함을 밀어내지 않고, 그저 곁에 두기로 했다. ‘이해되지 않음’조차 이해의 일부라면, 그 또한 자리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자리를 얻은 것들은 더 이상 증명받지 않아도 된다. 그것은 말해지지 않아도 존재한다.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나는 오히려 규정을 멈춘다. 이름을 붙이지 않고, 설명하지 않으며, 시간을 걸어두지 않는다. 존재하라고 요구하지도, 의미를 증명하라고 묻지도 않는다. 다만 비워둔다—그것이 무(無)의 형태를 유지한 채 숨 쉴 수 있도록.
어떤 것들은 손대지 않아야만 비로소 형태를 갖는다.
그렇게 오늘의 빈칸을, 오늘의 실제로 바꾼다.
당신의 한숨이 적어도 무언가를 밀어내기 위한 것이었다면, 그 바깥으로 밀려난 것들을 잘 살펴보아라. 그것은 당신이 감당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아직 언어화되지 않은 감각일 수도 있다. 방향을 잃은 것이 아니라, 머무를 자리를 찾고 있었던 것일지도, 어디에도 갈 곳이 없어서였을지도 모른다.
거울의 압제에서 벗어나, 비추는 일 대신 바라보기를 선택하라. 왜곡은 시선의 결함이 아니라, 깊은 해석의 불가능성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모든 시선은 심오한 필요로부터 비롯된다. 해석은 해석 자체에 이바지할 뿐, 진실은 언제나 해석 이전의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다.
이해한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자 했던 수많은 시도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끝내 파악하지 못한 감정, 도달하지 못한 거리, 번역되지 않은 몸짓—그 모든 실패가 의미의 뼈대를 만들었다. 진실의 파편을 고정시키는 것은 우리의 사명이자, 생존의 유일한 이유다.
태초부터 언어는
존재를 해명하지 못하였으니,
그저 사라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흉내 낼 뿐이었다.
진실은 돌아오지 않기에,
그 어떤 감정도
이해되지 않은 채 존재하도록
비워진 공간 하나를 남기니,
이해받지 못한 모든 한숨들이
밀어낸 그 자리에
실재는 조용히 자리를 잡는 것이라.
그러므로 잊지 말라.
우리는 언어가 아닌
존재로 말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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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지지 않은 감정은 내면에 흐릅니다.
이 글은 '가희: 그럼에도 희망을 이음' 연재 중 하나로,
감각을 지나 정돈되어 가는 생의 여정을 기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