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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아 Oct 25. 2024

터키 괴레메에서의 괴로운 밤

술여행의 서막, 그리고 그녀와의 동침

  저녁메뉴는 소고기와 양송이 구이였다. 우리는 숙소 부엌에 모여 재료를 손질하고 요리조리 구워 와인과 맥주와 함께 한상을 차렸다. 나의 일행들은 술을 좋아하고 또 잘 마셨다. 터키에 오기 전 한국에서 3번 정도 사전모임을 했는데 그때마다 새벽 2~3시까지 달렸다. 터키여행에서도 매일 음주를 했다. 나는 애주가는 아니지만 상대방이 원할 경우 주종 불문하고 잘 맞춰주는 편이다. 하지만 이날만큼은 술 마실 기분이 나지 않아 조금씩 마셨다.  

   

  어느덧 괴레메에는 짙은 어둠이 깔렸고 우리의 술자리도 무르익어 갔다. 맥주병과 숟가락을 이용해 마이크를 만들어 우리만의 노래방이 만들어졌다. 다들 노래도 한곡씩 하고 여행지에서의 즐거움을 한껏 즐기고 있었다. 나만 빼고 다들 취한 것 같았다. 그리고 나만 빼고 다들 즐거워 보였다. 곧이어 술자리에서 빠질 수 없는 '연애'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예진이는 어떤 사랑이 하고 싶어?"

  "깊이 생각해 본 적 없어요."


  사랑에 관한 체리언니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랐다. 아니, 사실은 지금 사귀고 있는 애인 앞이라 어떤 사랑을 하고 싶은지 언급하기가 부끄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은 이런 주제에 대해 말할 기분이 아니었다. 나는 지금 그 애인에게 삐졌으니까.  


짙은 어둠이 내린 괴레메의 밤


  술자리가 마무리될 즈음 나는 숙소 밖으로 나왔다. 배가 너무 불러서 소화를 시키기 위해서였다. 다른 일행들은 잠자리에 들 분위기였기에 나 혼자. 숙소 주위를 산책하다 보니 창문을 통해 거실이 보였다. 거실 소파에 앉아있는 은상오빠와 체리언니의 뒷모습이 보였고 그들은 다정하게 서로의 잔에 술을 따라주고 있었다. 어라? 아까는 그 자리가 아니었는데 왜 이 둘이 투샷으로 내 눈에 보이는 거지? 그리고, 다들 자러 들어가는 거 아니었나?    

 

  그 둘은 소파에 나란히 앉아 건배를 하며 술을 계속 마셨다. 나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설마 저러다 둘이 분위기에 취해 키스라도 하면?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우스웠다. 아니지. 남녀가 해외여행 와서 조금전까지 멋진 일몰을 감상하고 맛있는 식사와 와인까지... 그리고 음악.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게다가 사귄 지 얼마 안 된 여자친구(나)는 밖에 있었고 선규오빠는 잠들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둘이 무슨 일이 날까 걱정스러웠다. 같이 여행 와서 저러고 있는 내 남자친구에게 화도 났다. 여자친구 혼자 늦은 밤 산책을 나갔는데 나와보기는 커녕 문자 메시지 하나 없다. 안달이 났다. 다른 여자와 술을 마시고 있는 모습에 서글펐다. 체리언니한테 질투도 났다. 기분이 묘하게 이상하면서도 복잡하다. 마치 다섯 살 어린아이가 된 것 같았다. 나는 부정적인 생각을 떨치기 위해 이어폰을 꽂았다. 그리고 최근에 가장 많이 들었던 음악을 틀었다.   


                                   ♬                              

               천 번이고 다시 태어난대도 

                그런 사람 또 없을 테죠

            슬픈 내 삶을 따뜻하게 해 준 

                 참 고마운 사람입니다     

        그런 그댈 위해서 나의 심장쯤이야 

                 얼마든 아파도 좋은데

               사랑이란 그 말은 못 해도 

          먼 곳에서 이렇게 바라만 보아도

       모든 걸 줄 수 있어서 사랑할 수 있어서 

                 난 슬퍼도 행복합니다  

        <이승철 -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한국에서 은상오빠는 내 생각을 하다가 문득 이 노래가 떠올랐다고 했다. 그리고는 본인이 노래가사처럼 ‘그런 사람’이 돼주고 싶다고, 모든 걸 줄 수 있는 사랑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달콤한 말을 속삭였던 그는 지금 터키 괴레메의 한 숙소 거실에서 다른 여자와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이번 여행에서 이런 장면이 재생될 거라고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거실의 불이 꺼졌다. 소고기와 양송이구이로 가득 찬 나의 배도 조금 꺼졌다. 숙소 문을 열고 살금살금 침실로 들어갔다. 같은 방을 쓰는 체리언니가 깨지 않게 조심해야 했다. 하필 이날은 침대가 트윈이 아닌 더블베드 하나였다. 인기척을 느낀 언니가 내쪽으로 이불을 넘겨 덮어 주었다. 싫었다. 그녀의 손길도, 그녀 옆에서 자야 하는 이 상황도. 


숙소 이름은 APART ANGEL이지만 이곳에서 나의 기분은 천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둘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과 상상 때문에 쉽게 잠들기가 어려웠다. 나는 다시 이어폰을 꽂았다. 그리고 한국에서 그와의 통화 녹음 파일의 재생버튼을 눌렀다. 막 시작한 연인의 달콤한 속삭임을 듣고 있으니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터키에서는 한순간도 단둘이 대화하기가 힘든데 한국에서는 참 오래도 통화했었구나. 나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애써 잠을 청했다. 그리고 옆에 누워있는 체리언니를 의식하며 이렇게 생각했다. ‘언니, 오늘 이곳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어떤 분위기였는지는 모르지만 은상오빠는 한국에서부터 저랑 사귀고 있어요. 제 남자친구라고요.’  


  귀속에서 퍼지는 그와 나의 몽글몽글한 대화를 들으며 나는 속으로 알 수 없는 쾌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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