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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안나 Oct 25. 2024

사랑은 눈물의 씨앗(노래:나훈아)

- 내가 좋아한 노래들(My favorite songs)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며 아름다움이다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

먼훗날 당신이 나를 버리지 않겠지요

서로가 헤어지면 모두가 괴로워서 울테니까요

      - 작사:남국인, 작곡:김영광, 노래:나훈아



    “우리 안나 왔냐? 창가나 하나 해봐라!”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

    “앵콜~! 한 자리 더 해봐” 

1969년 첫 돌 사진(정안나), 저 하지 마세요!

  겨우 네 살, 뛰어 다닌 기억이 희미하던 그 무렵의 나는 나도 모르게 금성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노래를 듣고 외워진 노래를 아버지와 외할머니 동네 어르신들의 사랑과 기쁜 반기움 속에서 부르곤 했었다. 첫돌 때 막내이모께 선물 받은 스웨터를 다섯살까지 입었던 나는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는 가사와 멜로디에 쉽게 빠져들었고 쉽게 이해하고 금새 외워 부르던 것으로 초저녁 외할머니께서 아궁이에 불을 지피실때면 안방의 부엌문을 열고 부지깽이 들고 앉아 아궁이에 불을 지피시는 외할머니를 바라보며 이 노래를 불러드리곤 하였다. 어쩐지 알 수 없는 근심이 쌓여 있던 머릿수건 아래 얼굴에서도 나는 사랑을 보았었고, 그런 이유에서인지 외할머니와 나란히 앉은 작고도 둥근 밥상에서 외할머니 입으로 씻어주시던 김치마저도 달고 맛있던 나였다. 마치 2002년 영화 『집으로』의 장면들처럼 보다 더 선명하게 나의 기억속 사랑에 영원히 남을 나와 외할머니의 그림은 언제든지 포근한 안식처가 되어 주는 곳이 당연한 것이다.


  사랑은 왜 눈물의 씨앗일까?, 기쁨과 행복의 씨앗이 당연한 것을 하필 눈물의, 슬픔의 씨앗일까? 걷던 걸음이 멈추어지며 생각이라는 것이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사랑과 눈물의 씨앗이 동기화 되기 위한 조건들은 무엇일까,라고 궁금해하지만 일반적 우리들은 바로 슬픔과 이별이 그 중심에 있을 것이라는 짐작을 할 수 있다. 우변의 사랑과 좌변의 눈물의 씨앗이 같은 값을 갖기 위한 요소들로 다양한 변수와 상수들이 존재하며 이를 대입하여 설명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우변과 좌변의 중간의 등호를 만족하는 것이 필수조건으로 우변의 설탕 한 스푼과 좌변의 소금 한 스푼이 같은 값을 유지하기 위한 요인들 에는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는 일들이 동기화 여부의 기본이 되는 것으로 별빛 담은 한 번의 웃음과 고통이 고인 눈물 한 방울의 가치적 동량이 존재 가능 한 것인지도 살펴야 한다. 우크라이나전戰은 눈물의 씨앗을 만드는 중인 것일까?,라고 판단하자면 이처럼 큰 슬픔이 없는 것이다. 사랑을 증명하기 위한 도구로 쓰여지는 중이라는 것이냐는 말인 것이다.


  성경의 중심 사상인 사랑은 신약의 고린도전서 13장에 서술되어 있다. 이를테면 교회에 다니는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것으로,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사랑은 언제나 친절하며’로 시작되는 복음성가 속의 사랑에 대한 정의들로 이미 오래전부터 그 공감대는 매우 큰 아우라(aura)를 형성하며 유지하고 있다. 그 공감대 형성과 유지를 위한 방법으로 대중적 공유방법이 거론될 시점에서 모든 사람들을 쉽게 포용하고 이해시키기 위한 것으로 아마도 트로트(Trot)라는 대중가요의 한 장르가 탄생하게 되었을 것으로 유추 가능하다. ‘착한 사람 치고 노래 싫어하는 사람 없다’는 대한민국의 국민성에서 저급한 경향으로 내 귀에 찬송 아니면 없던 시간속에 이 트로트를 주입시키는 순간 나는 기절을 하는 것이 당연했고, 거품을 물고 죽어가듯 구토욕이 솟구쳐 ‘시여 침을 뱉으라(1975년 평론)’는 김수영 시인의 구호처럼 아무 바닥에라도 침을 뱉어내고 싶을 만큼이었다. 이는 전쟁 중 야영지에서 먹는 먼지돌밥과 평안한 궁정에서 먹는 하얀죽이나 스프의 차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 때 의식은 갑자기 ‘참으라’ 한 사랑에 동참하며 구토를 물리치게 되는 것이다. 


  “니가 그럴 수 있니?”, 라는

  있을 법한 원망의 소리를 몇 십 년째 등지고 살아 온 듯 하다. 초지일관으로 그저 모른다, 로 일관한 나였기에 


  “아니, 이것봐라! 니가 불렀잖냐! 니가 ‘사랑은 눈물의 씨앗’을 네 살 때 불렀잖냐! 왜 니가 아니냐!”, 라는 

  의미로의 질타로서, 그 어제와 다른 오늘과 내일의 나를 지키기 위해 부정한 나에게 세상은, 또 다른 사랑은 기억하고 다시 불러보기를 요청하셨었는지도 모른다는 판단에서 나는 생각해 본 적 없는 불효자나 배신자가 되는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은 고정된 옷을 갈아 입던 순간들인 것이었다. 의사 간호사일지라도 자신만의 집에 도착후에는 어느 누구보다도 평안한 자기만의 휴식을 찾는 것이 당연한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외출복과 평상복에서의 갈등처럼, 트로트는 정장의 수트와 몸빼바지의 비교로 나타날 수 있는 대중가요의 한 장르로서 비상시 삼가하여야 할 사항을 담은 원격통신 수단의 일종으로 유사시 사용 가치재(財) 일 뿐인 것이다. 현관을 들어서며, 혹은 마당에 들어서며 외출복은 벗어내고 외부활동으로 인한 인자도 털어내야 하는 것이다.


  트로트(Trot)의 유래는 1914년 1차세계대전이후부터 시작된 것으로 4/4박자 사교댄스의 스텝 또는 그 연주 리듬인 폭스트로트(fox-trot)을 근원으로 하고 있다. 어원적으로는 ‘여우의 빠르게 걷기’인 셈이다. 성경(聖經·Bible)의 예레미야 애가에서는 <시온 산이 황폐하여 여우가 그 안에서 노나이다(5:18)>로 불순종의 절망을 드러내고 있으며, 에스겔 서(書)에서는 <이스라엘아 너의 선지자들은 황무지에 있는 여우 같으니라(13:4)>로 경고중이었다. 우리들 순종의 틈으로 들어온 물결이 불순종의 길이 됨은 순종의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으로 태초의 하느님으로부터의 온전한 사랑을 망각하는 실수를 범하여서는 안되며 이 인간의 실수를, 여우조차도 태초의 하느님으로부터의 존재적 위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으니 여우의 생존법보다 못한 인간의 삶이 유지 되어서는 안될 일이 당연 한 것이다. 동물원의 여우 담당 동물사육사 이외의 여우는 인간에게 철저한 외부적 존재로서 격리대상인 것이다. 이솝의 우화는 실로 장엄하며, 놀라운 기적들인 것처럼 여우를 통한 단상(斷想)으로 여우와는 여우답게 사막의 어린왕자와의 이별처럼 작별을 하여야 하는 것이다.  


  참사랑 아닌 것은 모두 여우다,도 맞는 것이다. 여기서 여우란 상식적인 동물 여우(Fox) 그대로를 의미하는 것이다. 배가 고프면 사람을 헤칠 수도 있는 약육강식성 짐승의 기본을 의미하는 것으로 매우 위험한 것이다. 이러한 위험 요소를 자신의 주변에 스스로 배치한다는 것은 어리석음의 극치이며, 사랑이 눈물의 씨앗이 아니 되는 조건 형성에 이바지 하기 위하여서는 여우(Fox)와 늑대(Wolf)류의 모든 것은 외부로 배출을 해야만 한다. 요즘은 흔히 대중매체를 통하여 활동하는 배우들을 통상적으로 ‘여우들’,이라고 한다. 놀랍지 아니한가? 스스로의 거스름을 느끼며 자백하는 것과도 같은 데도 불구하고 아니라 하는 시청자나 문화 향유자가 더 의심스럽기나 한 것이다. 물론 여우는 여자배우를 의미하는 줄임말이다. 대중문화 속에서 태어나고 자란 내가 대중문화를 차단하는 어리석음을 낳게 된 경로는 참으로 유감스럽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단지 대중문화의 과잉섭취를 줄이고자 한 섭생법으로 단식을 자행한 이후 삶이 크게 변하여졌던 것이다. 모든 것이 낯설고 어렵게만 느껴지게 되기도 하였었던 것이다. 의도적이거나 비의도적으로 문학의 <낯설게 보기>를 일상적으로의 도입은 실로 새생명이지만 많은 조율을 필요로 했다. 즉, 여우가 여우로서 끝이 날지, 또 하나의 거듭나기재財로 사용될 지의 관건인 것이다.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 일으킨 사회적 영향력은 절묘(絶妙)함의 표현들이 받은 칭송의 연장이었을 것이다. 무명가수 나훈아(아저씨:사적 입장 부름)를 일약 스타로 만들고, 나훈아라는 가수가 누구인지 얼굴도 전혀 모르던 네 살 박이 나는 이 노래로 늘 사랑을 받으며 역행 아닌 역행의 삶을 움트게 한 즉, ‘눈물의 씨앗’을 읖조린 효과로 노래 부르는 기쁨에 반한 그늘이 늘 존재하게 되기도 했었을것이라는 추측이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나를 낳으신 우리엄마는 성장하는 내게 날벼락 말씀을 하셨다.


  “여자는 눈물이 많아야 해! 그리고 잘 들어! 우리 안나는 아빠가 둘이야!”

   "예?”   


  꽈당!   

           

  그 때까지 친아빠로 알고 지낸 분이 친아빠가 아니라니, 아빠가 또 있다니! 엄마, 지금 그 말씀이 무슨 말씀이세요?

  

  그 후 나는 지울 수 없는 상처를 가슴에 담고 살아야 했고 아침 해가 중천에 떠도 그 그늘은 사라지지 않아 더디고 무거운 삶이 된 것이 옳은 것이다. 나는 그대로 사랑이 눈물의 씨앗이 된 것으로 자라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꼭 그러하지 않음은 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외삼촌과 이모들과 외가 식구들의 총애가 사라지지 않았음이었으며 나의 친남동생을 셋이나 낳아주신 친아빠라고 믿고 따르던 아빠, 둘째아빠라고는 단 한번도 말 한적이 없는 친아빠보다 친아빠로 아버지 묘비에 나와 우리가족 이름을 모두 새겨 주신 아버지와 아버지의 친가족들의 늘 친딸, 친손녀처럼 맞아 주시고 어여삐 여기신 그 사랑들이 깊어질 때면 다시 그때마다 엄마의 근심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여자는 눈물이 많아야 해!”


  시제가 며칠 남지 않았다. 중학교 입학하면서부터 아빠가 아닌 아버지라고 부르던 아빠, 아버지께서 만8년전 선산에 증고조부모님과 묻히시고 마셨다. 나는 아버지 장례일에 가지 않았다.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병원에 입원 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곧 털고 퇴원하시리라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내게는 살아계시는 것만 같으신 아버지께서 해마다 모시던 시제를 이제는 친정엄마와 내 남편과 두 남동생, 그리고 문중에서 함께 지내게 되어 애들아빠는 곧 시제에 참석하러 간다. 혹시 동명의 영화 주제곡이었던 이 사랑은 눈물의 씨앗의 그 영화처럼 펼져지는 세상이 내가 되가고 있는 것일까,하니 아득하기만 하다. 영화는 본적이 없지만 사뭇 궁금한 것은 나를 낳으신 부모님의 참된 사랑인지 확인하고 싶기 때문인 것이다. 벌써 이 빌라에 이사 온지 만6년째, 이 집에서 사는 동안 나는 많은 시련을 겪었고 그중 하나가 많은 사람들이 죽어간다는 것이었다. 두 고모님 돌아 가시고, 코로나19직후 막내이모 돌아가시고, 등등 나의 친가 일가나 시댁의 어르신들 모두 몰살 되듯 죽어가는 중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이었던 윤정희씨나 남궁원씨도 이 곳에 사는 도중 사망 소식을 전하였고, 또한 애지중지하던 나의 딸 셋도 모두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삶을 살고 있으며 날마다 나는 공중권세 침입자들에게 이혼을 요구 받으며 살아왔었다. 나는 이대로 죽음에게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  


  사랑이 눈물의 씨앗인 것은 사랑했기 때문인 것이다. 


-나훈아 아저씨 근황 

    ▶나훈아 ‘2024 고마웠습니다-라스트 콘서트(LAST CONCERT)’ 

           *공연일자 : 2025년 1월 10일(금)~1월 12일(일)

           *공연장소 : KSPO DOM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엄마)께 <나훈아 디너쇼>에 초대해 드리고 싶었다.                                 

              그 꿈을 꾸는중 돌아가신 것이다.

-커버이미지 : Pinterest/55ed205491fd2ccbd958eddcd4caf147.jpg

-Writer : Evergreen정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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