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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하고, 올레

3. 걷기         (3) 비 맞으며 걷기

by 하광헌 Jan 03.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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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부터 하늘이 흐렸다. 출발하고 두어 시간은 구름 덕분에 전날의 불볕더위를 피할 수 있어 오히려 좋았다. 5코스 중간쯤에 이르렀을 즈음, 흐리던 하늘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봄비가 여름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일회용 비옷을 꺼내 입었다. 제주 사람은 비가 와도 우산을 쓰지 않는다고 한다. 제주도의 비는 얌전하게 위에서 아래로 내리지 않기 때문이다. 올레길을 걷기 시작하고 사나흘은 날씨가 좋았다. 소위 초심자의 행운은 날씨에도 적용이 되었다. 그것이 지속되리라는 자기 확신 때문이었던지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코스를 걷는다면 비를 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계산 오류 때문이었던지 비닐 우의만 챙겨 넣고 길을 나섰다. 좋았던 날씨가 지속될 것으로 착각하고 무거운 배낭을 걱정한 탓이기도 했다. 열심히 준비해 왔던 캠핑용 우의와 방수 덧신, 올레 패스포트가 젖지 않게 챙겼던 방수팩까지 고스란히 차에 두고 왔던 것이 잘못이었다. 몇 달의 철저한 준비가 별무 소용이었다. 아무리 열심히 준비했더라도 한 번의 방심으로 모든 것이 허위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일을 할 때는 끝까지 긴장을 놓아서는 안된다. 비를 맞으며 나의 잘못된 판단을 자책했다. 물론, 그 역시 완벽한 채비는 못되었으리라는 것은 그 이후 몇 번 겪은 비로 확인이 되긴 했다.


영화에도 등장한 카페에 들러 따뜻한 아메리카노로 몸을 데웠다. (사진 좌)

걷지 않아도 되는 이들은 통창을 통해 비 오는 바다를 마음껏 즐겼다. (사진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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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를 맞으며 계속 걷다 보니 빗물은 시원찮은 우의를 헤집고 들었고 폭이 좁은 모자챙을 타고 목뒤로까지 흘러내렸다. 내 옷에서 비에 젖지 않은 부분을 기가 막히게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좌표 삼아 걷던 한라산도 비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있을 만한 방향만 짐작할 뿐이었다. 살다 보면 비바람 속을 걷는 것 같을 때가 있다. ‘나는 지금 제대로 하고 있나? 이것이 바른 길인가?’ 이러한 의심은 처한 상황이 불안하거나 좋지 않을 때 더 자주 생겨난다. 그것은 현업에서 물러나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럴 때는, 보이지 않아도 저쯤에 한라산이 있는 것을 아는 것처럼 나의 판단을 믿고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빗줄기는 세지고 바람도 강해지면서 올레길 옆의 바다는 방파제를 넘어올 듯한 파도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었다. 허기진 배도 채우고 젖은 몸도 말릴 겸 눈앞에 보이는 식당을 찾아들었다. 맑은 날씨였다면 새파란 하늘과 바다를 자랑처럼 보여주었을 창문은 흘러내리는 빗물로 뿌옇게 가려져 사물의 형태만을 보여 줄 뿐이었다. 따스한 밥 한 그릇으로 몸을 데웠다. 감사가 저절로 생겨났다. 기대하지 않았던 성찬을 즐기고 미적거리다 비 내리는 길로 다시 나섰다. 고향집을 떠나 먼 길을 가는 아이처럼 자꾸 식당을 뒤돌아 보았다. 5코스 종점에 가까워질수록 비는 인정사정없이 내렸다. 홑겹의 비닐로는 마구 때리는 비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방수되지 않는 등산화는 물론이고 두 겹의 양말까지 흠뻑 젖었다. 갈 길을 찾지 못한 비가 작은 물길을 이루며 이리저리 몰려다니다 얕은 웅덩이가 되어 앞길을 가로막았다.


식당 창밖이 빗물로 뿌옇다.(사진 좌)

따스한 밥 한 그릇이 몸도 마음도 따뜻하게 해 준다.(사진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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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속에 한라산도 자취를 감췄다. 내 눈에 보이지 않아도 저 너머쯤에 있다는 것은 안다.(사진 좌)

비를 맞은 리본의 색이 더 선명하다.(사진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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