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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하고, 올레

3. 걷기 (2) 뙤약볕 아래에서 걷기

by HONEY

이상 기후 탓인지 오월이었으나 더위는 맹렬했다. 한 낮엔 30도를 훌쩍 넘었다. 자칫 늦장을 부려 출발이 늦으면 시작부터 불볕을 그대로 받으며 걸어야 했다. 태양은 길을 걷는 이라고 봐주지 않았다. 걸을수록 무거워지는 배낭만큼이나 햇볕의 무게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도 바당 올레를 걸을 때는 바닷바람이 불어와서 더위를 잠시나마 가시게 해 주었지만, 아스팔트 길에다 산등성이 마을길을 걸으면 그마저 기대할 수 없었다. 온평포구에서 출발해 표선해수욕장에 이르는 3코스와 이어서 남원 포구까지 이르는 4코스는 주로 아스팔트길로 되어 있었다. 그 길은 쏟아지는 땡볕을 피할 나무 그늘조차 없을 때가 많았다. 하늘의 빛을 되받아 올려주는 땅의 복사열까지 합심해서 나의 발걸음을 잡아채었다. 가끔 만나는 나무 한 그루가 선물하는 그림자에 기대어 쏟아지는 뙤약볕을 피해 잠시 쉬기도 했다. 그때마다 나를 살려주는 건 멀리 있는 시원한 에어컨의 바람이 아니라 바로 가까이에 서있는 작은 풀나무가 드리워 주는 그림자였으며 내 등에 지고 가는 덜그럭 거리는 얼음 조금 남아 있는 물 한 모금이었고 간간히 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한 줄기였다. 이처럼 살아가면서 내게 힘이 되는 것은 멀리 있는 그 무엇이 아니었다.


신풍 신천 바다 목장에서 보이는 바다와 한라산

불볕더위에 시멘트 길을 걸을 때면 작은 나무 그림자 하나에도 감사하다.

약간은 지루했지만 그래도 바다를 끼고 걷는 올레는 걸을 만했다. 표선 해수욕장에는 봄인데도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가족들의 모습이 간간이 보였다. 소금막 해변에서 멀리 보이는 리조트의 모습이 이국적으로 느껴졌다. 호텔 옆길을 지나니 막내가 어릴 때 놀러 왔던 기억이 났다. 물놀이를 좋아하는 막내가 리조트 내 수영장에서 나오지 않으려고 해 감언이설로 겨우 데리고 나왔던 기억. 맛있는 아침 식사를 하며 아이가 조잘거리던 기억이 눌러 두었던 스프링처럼 튀어나왔다. 리조트 옆길을 지나며 사십 대의 구부정한 큰 키의 사내와 함박웃음을 지으며 물장구치는 아이가 아직도 있을 거 같았다. 봄날의 이른 더위 속에 걸으며 그날이 그리워졌다. 막내에게 실없이 전화를 했다. 내 팔을 킥판 삼아 온수풀에서 수영을 하던 그 아기는 이제 스물이 넘은 숙녀가 되어 전화를 받았다. 아빠가 표선을 지나고 있노라고 말해 주었다. 생각해 보니 아이들은 내가 일해야 하는 이유이자 목적이었다. 자식들에게는 무엇보다 함께하는 시간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나는 아이들에게 크고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고 싶었다.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 줄 수 있는 튼튼한 버팀목이 되고 싶었다. 하루하루 개발 일정을 맞추어야 하는 피 말리는 상황이 있었다. 앞날을 예측할 수 없지만 결과를 내어 놓아야 하는 처지에 놓이기도 했다. 수도 없이 밤을 새우면서도 버틸 수 있었다. 그것은 유치원에서 배워온 ‘아빠 힘내세요’를 불러 주던 두 녀석의 율동과 온수풀에서 물장구치며 환하게 웃던 막내의 해맑은 얼굴 덕분이었다. 아이들을 바라보면 언제나 미안한 마음뿐이고 더 악착같이 살았어야 했다는 후회가 여전히 나를 짓누른다. 좋은 아빠가 되지 못했음을 늘 부채처럼 지니고 살지만 세 녀석이 최소한 아빠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올레길을 걷기로 한 사람은 땡볕 아래에서도 걷는 것처럼 우리 사는 것도 이유가 무엇이든 시작했으면 가야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표선 소금막 해변에서 보이는 리조트가 이국적으로 느껴졌다. 걷다보면 보이는 제주말이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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