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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하고, 올레

2. 도전 437Km (2) 드디어 출발

by HONEY

육지에서 제주로 가는 배편의 출발지는 목포, 완도, 진도, 여수, 부산 등이 있었다. 인터넷에는 부지런한 사람들이 올려놓은 수많은 정보들이 있어 원하는 조건만 잘 설정하면 되었다. 몇 가지 조건을 나열해 보자면, '가능하면 배 타는 시간이 짧을 것. 그렇다고 차로 이동하는 시간이 무작정 길어지는 것은 곤란하다.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걸을 수 있도록 이른 아침 시간이 좋겠고, 그러려면 배에서 잠을 자야 하는데 많은 금액을 지불하지 않으면서도 편하게 쉴 수 있으면 좋겠다'등이었다. 이러한 조건에 맞춰 여수-제주 편이 나에게는 최선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해당 여객선에는 남의 방해를 받지 않고 누워서 잘 수 있는 캡슐룸이 있어 더 좋았다.

호텔과 제주로 갈 배편까지 예약을 마치고 출발할 날이 가까워질수록 걱정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염려는 마치 밭에서 자라는 잡초와 같았다. 일부러 씨를 뿌리거나 애써 가꾸지 않아도 스스로 자라났다. 조그마한 틈만 있으면 비집고 올라왔다. 게다가 종류도 다양했다. 잡초가 장마뒤에 엄청나게 불어나는 것처럼 한 번 터지면 걷잡을 수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가장 큰 걱정은 ‘제대로 걸을 수 있을까’였다. 많은 선험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발가락에 물집은 기본이고 한 달간 배낭을 짊어지고 걸을 때 체력이 안 따라줘서 힘들다고 했다. 매일 갈아 신을 발가락 양말을 준비하고 또 발에 바를 바셀린 한 통을 샀다. 봄이라도 한낮의 비닐하우스 안은 더워서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럴 때도 짬을 내어 근처 강둑을 한 시간 정도 걸었다.


오월의 햇살 속에 핀 찔레꽃과 아카시아꽃이 색과 향기로 유혹하고 있었지만 걷기 연습이라 생각하니 제대로 느낄 수가 없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지금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것만큼 바보 같은 일이 없다.

걷기 훈련을 위해 강둑을 걸었다.

출발 당일, 그동안 챙겨 두었던 짐을 모조리 꺼내 배낭에 차곡차곡 넣었다. 차를 갖고 가니 반드시 필요할 거 같지 않은 짐도 실었다. 예를 들면, 가다가 좋은 경치가 있거나 쉴 만한 곳이 있으면 앉을 캠핑 의자 같은 것이었다. 그 의자는 한 번도 써보지 못했다.

2024. 5. 21. 오후 7시 30분. 한 달간 지낼 짐을 설렘과 약간의 긴장과 함께 차에 싣고 집을 나섰다. 내비게이션이 일러 주는 대로 열심히 운전해서 여수여객선 터미널에 도착했다. 유튜브를 보며 수 차례 시뮬레이션을 거치긴 했지만 선착장을 찾아가는 일부터 혼선이 생겼다. 다행히 출항 두 시간 전에 도착한 덕에 약간의 헷갈림은 큰 문제가 되질 않았다. 잘 준비하고 여유 있게 움직이는 것은 리스크에 대처하는 좋은 방법 중에 하나임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낯선 곳에서는 늘 헤매기 마련이다. 나는 그런 불편을 싫어했다. 그렇지만 시도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은 옳다.

예상보다 큰 배였다. 최대한 촌놈 티를 내지 않으려 주위를 살피며 연신 셔터를 눌렀다. 내게 배정된 자리에 잠옷과 세면도구가 든 가방을 던져놓고 배 구경에 나섰다. 선실 복도는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소리로 가득했다. 내릴 때 선장의 방송으로 안 사실이지만 여수에 있는 여자 고등학교 학생들이 제주로 수학여행을 가는 길이었다. 아이들의 까르르 웃는 소리가 선상의 휴게실과 오락실 그리고 갑판 위에까지 흘러넘쳤다. 걱정으로 가득 찬 초로의 나그네에게도 밝은 기운이 전해졌다. 존재만으로 누군가에게 힘이 된다는 것은 귀한 일이다. 나는 아무에게도 그러질 못했구나 생각하니 부끄러워졌다. 차가 실린 짐칸부터 꼭대기 객실까지 구석구석 구경하고 이동할 시간 동안 머물 캡슐로 돌아왔다. 가만히 누워 출발의 느낌을 글로 적었다. 그날의 일기는 이렇게 썼다. ‘출항 30분 전에 멀미약 먹음. 01시 10분에 안내 방송 : 항로상 예상 파고 0.5m, 소요시간 5시간 30분. 정말 오랫동안 생각만 하던 일을 마침내 실행에 옮긴다. 내 인생에도 이런 날이 오는구나 하는 약간의 벅참과 아내를 두고 혼자 가는 것에 대한 미안함이 overlap 된다.’

이제 드디어 출발이다.


배가 커서 한 번에 사진이 다 담기질 않는다.

캡슐룸 : 똑바로 앉기에도 힘든 높이지만 하룻밤 잠자기에는 충분하다.

선상에서 바라본 여수 밤바다 : 벚꽃은 지고 없었지만, 밤바다에 비친 불빛이 봄꽃만큼이나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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