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걷기 (1) 무작정 걷기
밤사이 배를 타고 이른 아침에 제주항에 내렸다. 갑판에서 멀리 보이는 사라봉이 반가웠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렌터카로만 다녔던 제주에서 내 차를 몰고 다니는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제주로 오기 직전에 열심히 세차한 덕분에 눈에 들어오는 차의 보닛이 유난히 더 반짝거렸다. 동쪽을 향해 달리니 익숙한 제주의 경치가 서서히 눈에 들어왔다.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고민하다가 1코스에서 21코스까지 번호 순서대로 걷기로 했다. 하루 먼저 비행기로 도착해서 아침 일찍 걷기 시작한 옛 직장 선배와 1코스의 중간 지점에서 만났다. 반가운 인사를 나눈 후 신발끈을 질끈 동여매고 작은 배낭을 가볍게 울러매었다. 워밍업 하듯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아스팔트의 감촉이 발바닥을 통해 온몸으로 느껴졌다. 성산포의 바다내음이 바람에 실려왔다. 밤새 배안에서 엔진 소음으로 잠을 설친 탓이었을까 아니면 이제 시작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걸으면서도 몸이 부웅 떠 있는 기분이었다. 1코스는 아내와 같이 걸은 적이 있었다. 종달리에서 성산 일출봉에 이르는 길은 차로 여러 번 다녔던 길이라 마음도 편안했다. 성산 일출봉이 가까워질 즈음 성산포를 노래한 이생진 시인의 시비가 있었다. 입사 후 얼마되지 않았을 때 그분의 시집을 읽었던 기억이 어슴푸레하게 떠 올랐다. 잘난 체하려고 시 몇 구절을 외웠고 성산포에 가면 꼭 그 시집을 들고 가서 한 번 읽어 보리라 했었다. 올레길 걷기 초입에 신입사원때 읽었던 시를 만나다니 새삼스럽기도 했고 반가웠다. 수 차례 다녀간 성산이지만 여기에 시비가 있을 줄은 몰랐다. 차를 타고 다니면 보지 못하였을 이런 장소를 앞으로도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생겨났다.
정신없던 첫날 걷기를 마무리하고 둘째 날 광치기 해변에서 온평포구에 이르는 2코스를 걸었다. 가는 길에 인근 마트에 들러 생수도 야무지게 챙겨 넣었다. 중간 지점인 대수산봉에 오르니 제주도 동남권의 조망이 한눈에 들어왔다. 앞으로 가야 할 경로와 내 발과 무릎에 집중하다 보니 풍광을 편하게 즐길 여유는 없었다. 혹여나 길을 놓칠까 싶어 열심히 표지를 찾아가며 걸었다.
길을 가다 보면 어떤 이가 담벼락에 갈기듯 표시해 둔 하늘색 화살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비록 희미하지만 초보자가 길을 찾아가게 해주기도 하고 잘 가고 있다고 알려주기도 하는 표식이었다. 살면서 누군가가 나를 향해 흔들어 주는 작은 손짓과 따스한 눈길이 큰 힘이 될 때가 있다. 길에 익숙하지 않은 나그네에게 전봇대에 희미하게 그려진 화살표 하나가 작지만 커다란 도움이 되는 것처럼 세상살이에 힘겨워하는 이에게 지어주는 옅은 미소가 상대에게 용기를 주고 응원이 되기도 한다. 나도 가까운 사람들에게 작은 힘이라도 되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걸었다.
초반이라 여전히 길은 헷갈리고 걸음도 익숙하지 않지만 그럴 때는 무작정 걷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