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강후가 떠난 자동문 너머를 멍하니 바라보던 선수들과 직원들은, 마치 거대한 해일에 휩쓸린 생존자들처럼 한동안 미동도 하지 못했다.
유시영이 마른침을 삼키며 겨우 입을 뗐다.
“방금... 퍼터였지?”
그의 눈은 여전히 100미터 앞 깃대 밑에 멈춰 선 공에 고정되어 있었다. 퍼터로 공을 띄워 100미터를 보낸다는 것은, 그들이 평생 믿어온 골프의 물리 법칙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비웃음은 경외로, 경외는 이내 지독한 열등감과 공포로 바뀌었다. 저 괴물이 요구한 미션은 이제 더는 농담이 아니었다.
생존의 문제였다.
밤이 깊어갈수록 연습장은 거친 숨소리와 쇳소리로 가득 찼다.
성공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드라이버를 성공하면 아이언에서 빗나갔고, 웨지를 맞히면 다시 드라이버에서 무너졌다.
새벽 3시가 넘어갈 무렵,
기묘한 변화가 감지되었다. 평소라면 서로의 스윙엔 관심도 없던 선수들이 하나둘 타석 사이의 경계를 허물기 시작한 것이다.
"야, 건한아. 드라이버 잡을 때 오른손 검지에 힘 빼봐. 아까 그 괴물이 칠 때 보니까 헤드 무게로만 툭 던지더라고. 나 그렇게 하니까 방금 100미터 맞췄어."
"진짜? 나는 웨지 칠 때 아예 눈감고 쳐봤거든. 감각에만 집중하니까 탄도가 일정해지더라. 시영이 너도 해봐."
자존심 강한 유시영도, 무뚝뚝한 강건한도 어느새 땀에 젖은 채 머리를 맞댔다. 성공한 비법을 나누고, 실패한 이유를 분석했다. 개개인의 점수가 아닌 '팀 전원의 성공'이라는 미션이, 각자도생 하던 오합지졸들을 하나의 군대로 묶어주고 있었다.
백강후는 사무실 복도 어둠 속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선수들이 서로의 샷을 보며 토론하는 모습, 그리고 기록팀이 자발적으로 달려가 그들의 미세한 각도를 모니터로 확인해 주는 장면.
그의 입가에 찰나의 미소가 스쳤다. 그것은 인정의 미소라기보다, 단단했던 바위에 드디어 금이 가기 시작했다는 석공의 확신에 가까웠다.
하지만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구석 타석에서 묵묵히 채를 휘두르던 서국유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할머니의 교통사고 소식이었다. 사색이 된 국유는 채를 내팽개치고 연습장을 뛰쳐나갔다.
다음 날 아침, 붉게 충혈된 눈으로 돌아온 국유를 맞이한 것은 백강후의 서늘한 명령이었다.
"무단이탈. 짐 싸라."
"코치님! 할머니가 돌아가실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국유가 울먹이며 항변했고, 지켜보던 선수들도 코치의 비정한 처사에 동요했다.
그러나 백강후는 흔들림이 없었다.
"네 사정은 네 사정이고, 규칙은 규칙이다. 프로는 필드 위에서는 가족의 죽음 앞에서도 샷을 휘둘러야 하는 직업이야. 그 무게를 못 견디겠으면 골프는 취미로만 해라."
백강후는 국유의 발 앞에 클럽 하나를 던졌다.
"살고 싶으면, 오늘 밤이 지나기 전까지 어제 미션을 두 배로 수행해. 14개 클럽이 아니라 28개. 모든 클럽으로 두 번씩 연속 성공해라. 단 한 번이라도 성공하면 된다."
다시 밤이 찾아왔다. 다른 선수들은 이미 미션의 끝자락에서 지쳐 쓰러져 있었지만, 국유의 타석에는 다시 불이 켜졌다. 할머니를 살려야 한다는 간절함과 코치를 향한 증오가 뒤섞여, 국유의 손바닥에서는 피가 배어 나왔다. 그는 반창고를 칭칭 감은 채 다시 채를 잡았다.
데이터 팀은 숨을 죽인 채 국유의 샷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뽑아냈다.
"코치님, 국유의 집중력이 평소의 3배 치입니다. 근육의 미세한 떨림조차 억제하고 있어요. 수치가... 완벽하게 일정합니다."
백강후는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며 낮게 읊조렸다.
"바위가 쪼개지기 시작하는군. 곧 샘이 터지겠어."
탕—!
마지막 28번째 공이 100미터 앞 깃대 하단을 날카롭게 때렸다. 그 소리는 마치 국유의 가슴속에 맺혀 있던 응어리가 터지는 소리 같았다.
채를 쥔 손의 힘이 풀리며 클럽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국유는 그대로 무릎을 꿇더니 타석 바닥에 얼굴을 묻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된 반창고가 찢겨 나간 손등 위로 국유의 거친 숨결과 눈물이 쏟아졌다. 할머니에 대한 걱정, 코치에 대한 원망, 그리고 자신을 증명해 냈다는 안도감이 뒤섞인 처절한 울음소리가 고요한 연습장을 가득 채웠다.
멀리서 지켜보던 선수들은 차마 다가가지 못한 채 발을 멈췄다.
비정한 명령을 내렸던 백강후가 천천히 국유에게 다가갔다. 선수들은 코치가 또 어떤 독설을 내뱉을까 싶어 마른침을 삼키며 지켜보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엎드려 떨고 있는 국유의 굽은 등을 커다란 손으로
'툭'
무심하게 한 번 치고는 그대로 돌아서 연습장을 나갔다.
그것은 격려도, 사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투박한 손길이 국유의 등에 닿았다가 떨어지는 순간, 지켜보던 이들은 느낄 수 있었다.
'통과다.'
백강후의 그림자가 사라진 연습장에는 한동안 국유의 흐느낌만이 감돌았다. 남겨진 선수들과 운영팀 직원들의 눈빛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들은 이제 백강후를 단순히 무서운 폭군이나 사기꾼으로 보지 않았다. 그가 휘두르는 '정'이 얼마나 아픈지 알게 되었지만, 동시에 그 정을 견뎌내면 자신들의 가슴속에서도 국유처럼 뜨거운 무언가가 터져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유시영은 떨리는 손으로 제 아이언을 다시 고쳐 잡았다. 강건한은 땀을 닦으며 국유의 어깨를 조용히 짚어주었다. 데이터 팀 직원들은 모니터에 기록된 국유의 완벽한 탄도 궤적을 보며 자신들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공포는 동경으로, 그리고 그 동경은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지독한 열망으로 전염되고 있었다.
석천(石泉).
굳게 닫혀 있던 바위의 틈새로, 마침내 비릿한 흙내음을 머금은 첫 번째 샘물이 솟구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