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가장 어려운 샷은 바로 다음 샷이다

트라우마를 마주하는 선수들!

by 일야 OneGolf


​석천건설 골프단 사무실의 공기는 서늘했다. 백강후가 부임 후 처음으로 소집한 운영 회의실 탁자 위에는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기존 예산서가 낱낱이 파헤쳐져 있었다.


​"이게 뭡니까?"


​백강후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선수 홍보비'와 'VIP 의전 비용', 그리고 '해외 전지훈련 체류비' 항목이었다.

운영팀장이 당황하며 대답했다.


​"그건 협찬사 관리와 선수들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필수적인..."


​"다 깎아."


​백강후의 단호한 한마디에 회의실이 얼어붙었다.


​"직원들 월급, 선수들 연봉. 그 두 가지만 빼고 나머지 예산은 전부 회수한다. 그 돈으로 최고급 탄도 추적 시스템 다시 깔고, 연습장 바닥 아스팔트로 다 갈아엎어. 전지훈련? 이 마당에 비행기 타고 소풍 갈 생각 마라. 여기서 죽든 살든 결판낸다."


​팀장이 항변하려 했지만, 백강후는 이미 스카우트 팀장에게 고개를 돌린 뒤였다.


​"스카우트 팀장. 앞으로 선수 영입은 당신이 전권을 가져. 우승 경력, 집안 배경, 협찬 가능성... 그딴 거 다 무시하고 오직 '결핍' 하나만 봐. 당신이 뽑아오면 난 100% 수용한다. 대신, 내 훈련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가는 놈을 뽑아오면 당신도 같이 나가는 거야. 알겠나?"


​스카우트 팀장의 눈에 처음으로 생기가 돌았다. 늘 윗선의 눈치를 보며 '스펙' 좋은 선수만 뽑아오던 그에게 부여된 진정한 자유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거."


​백강후가 창밖에서 연습 중인 선수들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오늘부터 연습장 정문 폐쇄한다. 외부인 출입 금지. 특히 선수 부모들, 연습장에 발 들이는 순간 그 집 자식은 바로 제명이다. 실력이 전부인 곳에 혈연이나 인맥이 끼어들 자리는 없어. 여긴 유치원이 아니라 전쟁터니까."


​그날 오후, 연습장 정문에는 '외부인 출입 금지 - 석천건설 골프단 성역(聖域)'이라는 팻말이 걸렸다.


​화려한 홍보용 배너들이 뜯겨 나간 자리엔 날카로운 정적만이 남았다. 선수들의 화려한 사생활을 관리하던 홍보팀 직원은 청소 도구를 잡았고, 데이터를 분석하던 팀은 밤낮없이 장비를 개조했다.
​호화로운 전지훈련 대신, 삭막한 연습장 바닥이 하나둘 뜯겨 나갔다. 매트가 걷힌 자리에는 차갑고 딱딱한 아스팔트가 깔리기 시작했다.


​"코치님, 정말 저 위에서 치게 하시게요?"


​운영팀 직원의 물음에 백강후는 낡은 구두로 아스팔트 바닥을 짓이기며 대답했다.


​"매트는 실수를 숨겨주지. 하지만 아스팔트는 자비가 없어. 뒤땅을 치는 순간 손목이 나가거나 채가 부러질 거다. 살아남으려면 공만 깨끗하게 걷어내는 수밖에 없지."


​오후 연습 시간이 되자, 선수들은 경악했다. 따뜻한 휴게실도, 푹신한 매트도 사라진 그곳엔 오직 검은 아스팔트와 서슬 퍼런 눈의 백강후만이 서 있었다.


​"이곳엔 이제 골프 선수는 없다. 오직 바위를 뚫고 나올 샘물이 될 놈들만 남는다."


아스팔트 바닥에서 올라오는 지독한 타르 냄새와 백강후의 서슬 퍼런 선언에 선수들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뒤땅을 치면 손목이 나간다는 경고는 단순한 위협이 아니었다. 선수들은 이미 머릿속으로 아스팔트를 때려 박살이 나는 클럽과 자신의 비명을 시뮬레이션하고 있었다.


​그 무거운 정적 속에서, 유시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평소의 오만함은 간데없고, 마치 사형 선고를 기다리는 죄수 같은 표정이었다.


​"코치님... 질문이 있습니다."


​백강후가 고개를 까딱했다.


​"저... 다들 어제 밤샘 연습에, 국유 일까지 겹쳐서 체력이 바닥입니다. 이 상태로 아스팔트에서 치면... 정말 사고가 날 것 같습니다. 오늘 하루만... 딱 하루만 쉬게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동료 선수들이 경악하며 유시영을 바라봤다.


'저 미친놈, 코치 성격에 여기서 불호령이 떨어지면 아스팔트 위에서 대가리 박기를 시킬지도 모르는데.'


다들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백강후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그는 손목시계를 슬쩍 보더니 너무나도 선뜻,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그래? 듣고 보니 그렇군."


​"네...?"


​"전원 외박이다. 지금 당장 짐 싸서 나가."


​선수들은 물론, 옆에 있던 운영팀 직원들까지 귀를 의심했다. 백강후는 멍하니 서 있는 선수들을 향해 손을 휘저으며 쐐기를 박았다.


​"못 들었어? 오늘부터 내일 아침까지 연습장 폐쇄다. 술을 마시든 잠을 자든 마음대로 해. 단, 내일 아침 6시에 이 아스팔트 위에 서는 것은 각자의 책임이다. 끝."


​선수들은 홀린 듯 짐을 챙겨 연습장을 빠져나갔다.
​연습장 정문이 닫히고 조명이 하나둘 꺼졌다. 텅 빈 연습장, 검은 아스팔트 위에 백강후와 데이터 팀장만이 남았다.


​"코치님, 정말 괜찮겠습니까? 기껏 잡아놓은 기강이 흐트러질 수도 있습니다. 애들이 나가서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백강후는 아스팔트 위에 떨어진 작은 돌멩이 하나를 발로 툭 차며 낮게 웃었다.


​"흐트러져? 아니, 저놈들 지금 밖으로 나갔어도 머릿속에선 이미 아스팔트 위에서 수만 번 스윙하고 있을 거다. 쉬라고 한다고 쉴 수 있는 놈들이 아니거든."


​백강후의 말대로였다. 연습장을 벗어난 선수들의 단톡방은 순식간에 불이 났다.


​[유시영: 야, 이거 진짜 쉬라는 거야? 함정 아냐?]

[강건한: 쉴 수가 있냐? 아스팔트에서 뒤땅 치면 시즌 아웃인데... 나 지금 아파트 단지 주차장에서 빈 스윙 연습 중이다.]


[김인아: 다들 조심해. 내일 아침이 진짜 지옥일 테니까.]


​선수들은 각자의 집으로, 혹은 거리로 흩어졌지만 그들의 손은 허공에서 끊임없이 스윙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


백강후는 그들에게 '휴식'을 준 것이 아니라, '아스팔트라는 공포를 곱씹을 시간'을 준 것이었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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