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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샤인 Oct 01. 2024

장래희망은 다정한 사람입니다

영상의학과 의사의 이야기 3.

"교수님, 아이스 아메리카노 드시는 거 맞죠?"


생글생글 웃는 얼굴의 코워커가 컵의 겉면에 물방울이 송송 맺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건넨다. 요 며칠 학회며 공휴일로 쉬는 날이 많아지다 보니 오늘 초음파 일정이 평상시보다 많이 예약되어 있었다.  오전부터 오후까지 어깨를 혹사할 내가 안쓰러웠는지, 이 다정한 코워커는 오전 일정을 시작하기 전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형태의 응원을 보내온 것이다.


나는 얼죽아다.

그리고 내가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세계에 첫 발을 들였던 날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의대 6년을 수료하고 나면 의사국가고시를 보게 되고, 국시에서 합격하면 정식으로 면허를 가진 의사가 된다. 그 이후 바로 개업을 하기도 하고, 인턴 1년 - 레지던트 4년 과정을 마치고 전문의가 되기도 한다.


이 1년간의 인턴 기간이 흥미롭다. 내가 하고 싶은 전공과와는 무관한 과를 로테이션하면서, 말 그대로 '모든 일'을 수행하게 되기 때문이다. 보통 인턴 1~2명이 병동 1개를 관할하기 때문에, 인턴은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일한다. 병동에서 인턴이 해야 할 일들은 밤이고 낮이고 발생하므로, 당직 기간 동안은 1시간 이상을 연달아 자기가 어렵다. 세수? 그게 뭔가요 먹는 건가요. 어차피 잠을 자지 못하기 때문에 세수할 시점도 애매하다. 30분 정도의 시간이 주어지면 식당에 가서 밥을 먹을 것인지 30분만이라도 쪽잠을 잘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그런 당직이 보통 일주일 정도 이어지고, 일주일마다 12시간 정도의 오프가 주어지면 병원 밖으로 나가 이동하는 시간이 아까워 차라리 당직실에서 밀린 잠을 자는 것이 흔한 인턴의 일상이다.


내가 얼죽아가 된 사건은 바로 이 인턴 기간에 일어났다. 때는 가을, 당시 나는 정형외과 인턴이었다.  추석 연휴 내내 단 하루도 오프가 없었기에, 드레싱을 하러 가면 환자분들이 "선생님은 왜 일주일 내내 집에를 안 가세요?"라고 물어보실 정도였다. 추석이라고 다른 인턴들이 오프를 나간 상태여서 다른 병동의 일까지 하다 보니 거의 3일 밤을 연달아 쪽잠조차 자지 못했다. 안 그래도 없던 체력이 마이너스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때 어느 간호사 선생님이 나를 불쌍한 듯이 바라보며 "이거 드시고 하세요"라고 건넨 것이, 컵의 겉면에 물이 송골송골 맺힌 아이스 아메리카노였다. 그동안 달콤하고 부드러운 음료를 선호했던 나에게, 아메리카노는 많이 태운 보리차 같은 애매한 포지션의 음료였다. 하지만, 체력이 바닥을 찍어 넋이라도 있고 없는 상태에서, 타인의 조건 없는 다정한 위로가 담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신 순간! 나는 강경 아이스아메리카노파로 새롭게 태어나게 되었다. 다정함이 한 사람에게 주는 위로가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를 깨닫게 된 것이다.


자라면서 여러 가지 이유로 다정함을 배우지 못했다. 그러나 삶의 가장 척박하던 어느 날에 건네받은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내밀었던 그 손의 다정함은 나의 삶을 뒤흔들었고, 삶을 바라보는 태도를 바꾸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혔다. 성취는 스스로에게 만족감을 줄지 모르지만, 다정함은 타인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걸음마를 배우듯 다정함을 배워간다. 감사한 것은, 내 주변에 다정한 사람들이 참 많았고 지금도 많다는 사실이다. 내가 이렇게 막되어먹은 사람인데도 그들은 한결같이 나에게 다정하다. 그들의 다정함은 나의 어떠함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어떠함 때문인 것도 잘 안다. 그래서 그들의 다정함이 나에게 와닿을 때- 내가 말실수를 했을 때 둥글게 그것을 덮어준다거나, 스치듯 말한 작은 물건들을 선물해 주거나, 하늘이 예쁘다고 연락을 보내줄 때- 나는 그 창조적인 다정한 행동들을 마음 깊은 곳 잊히지 않을 곳에 저장해 두고 여러 번 반복해서 꺼내어본다. 외우고 또 외워서, 언젠가는 나도 타인에게 그렇게 해주리라 결심하면서.


지금도 여전히 부족하지만, 나는 매일매일 다정한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며 열심히 배우고 있다. 어느 날, 나의 존재가 누군가의 지친 삶에 다정함으로 가 닿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면서.


그래서 내 장래희망은, 다정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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