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돈과 헤어지고 나서 집에 돌아온 안사장은 아내의 귀가를 기다렸다.
친동기들에게 잘난 사윗감을 실컷 자랑하며 기분이 좋아서 잘하지도 못하는 술까지 걸치는 바람에, 함께 데리고 갔던 아들 재영에게 기대어 비틀거리며 집안으로 들어오는 한여사를 보고 그는 혀를 찼다. 재영은 모친을 안방까지 모셔다드리고 나서 친구들과 만나기로 했다며 다시 외출했고, 집에는 다시 안사장네 부부만이 남게 되었다. 역시 처가의 여자어른들이 주는 술을 넙죽넙죽 받아마신 진원을 챙기느라 그들의 딸은 귀가 전이었다.
그래 기어이 선보이고 오니 속이 후련해?
콧노래까지 부르며 옷을 갈아입는 처에게 안사장이 핀잔을 주었으나 그 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유 그럼그럼. 우리 친자식들과는 비교도 안되게 잘난 사위자식 아뇨. 당신도 봐봐요. 내 친정이나 당신네 집이나 어디 그런 혼사 있었어요? 언니들은 물론이고 조카딸애들도 침을 줄줄 흘립디다 흐흐. 우리 김서방은 차암, 예의 깍듯하게 차리면서도 짓궂은 농담도 수더분하게 잘 받아주고, 내가 살아오면서 그렇게 어깨에 힘이 들어간 때가 없었어요. 결혼식날에는 더하겠지!
…당신이 좋았다면 됐어.
안사장은 중얼거리듯 말하고는 주방으로 가서 꿀물을 타다 아내에게 갖다주었다. 한여사는 타박은커녕 입속의 혀처럼 구는 남편이 얼떨떨하면서도 군말 없이 음료를 마셨다.
상대남자애 말야.
응?
자신이 목을 축이고 나자마자 기다린 것처럼 안사장이 입을 열자 한여사가 되물었다.
그 우리 시은이랑 영상에 찍힌 남자 말야.
아유 당신 왜 또 그 얘긴, 재수 없게!
한여사가 짜증을 냈다.
그 왜 김서방이랑 친형제처럼 자랐다잖아?
아 뭐 좋은 일이라고 그 얘긴 또 꺼내냐고!
아니 들어봐. 사돈이 말하길, 글쎄 그 일로 너무 괴로워하다가 하면 안될 일을, 제 마음이 마음대로 안되니까 너무 괴로워하다가… 죽을 뻔했다잖아. 그러면서 죄송하다고 용서해달라고 하더라고, 바깥사돈이.
뭐요?
한여사는 술기운이 달아나버렸다.
아이고 세상에 뭐 그렇다고 그런 짓까지… 하긴 그러고 보니,
한여사가 손바닥을 마주쳤다.
왜.
아니 재영이가 그 영상 보더니 그 남자애가 우는 것 같다고 너무 슬픈 얼굴이라고 그럽디다. 나야 뭐 그냥 잘생긴 것만 겨우 보였는데 그러잖아.
시은의 남동생은 누이의 소식을 전해듣고 입을 벌리며 놀라긴 했으나 곧 에이, 설마 누나가요? 좀처럼 믿지 않으려 했다. 그래, 설마가 사람 잡는다잖아! 한여사는 아들의 반응에 더 기가 막혀서, 원래는 그래도 손위누이인 딸의 체면을 생각해 재영에게는 보여주지 않으려 했던 문제의 영상을 홧김에 공개해버리고 만 것이다.
한여사는 전화기를 건네주며 네 누나가 바람이 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가슴을 쳤다. 그이의 아들도 심각한 얼굴로 영상을 들여다보았다.
바람난 사이라고 하기엔 좀 이상한데요, 엄마.
재영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이 남자, 우는 거 같은데.
그게 보이냐? 난 도통… 느이 누나 얼굴도 겨우 알았는데.
좋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엄청 괴로워하는 거 같잖아요.
아들의 말에 한여사는 다시 영상을 볼까 하다가, 형제 같은 절친의 여자나 탐내는 후레자식 같은 놈의 면상을 또 보고 싶지는 않아서 에이, 그러거나 말거나 나쁜 눔! 하고 다시 머리를 싸매고 누워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약속받고 와서 이제 후련해요?
뭐 두고 봐야지. 그 양반도 안사람한테 꽉 붙잡혀 사는 것 같았는데, 그래도 딸자식 둔 부모라고 내 마음 이해해주시더구만. 차암 양반이야.
그렇게 양반이니까 마누라한테 져주고 사는 거지, 누구와 달리.
한여사가 콧방귀를 뀌자 안사장이 여전히 느릿한 어조로 불만을 표했다.
내가 이긴 건 또 뭐야.
아무튼, 그 아버지 보면 아들을 알 수 있다고, 그래서 내가 더 그 자리 놓치고 싶어하지 않는 것도 있는 거예요. 알지도 못하고선 괜히 나서서 난리야.
당신 말도 맞지만 내 말도 맞는 거잖아.
하여간 자식밖에 모르는 양반.
자식까지 모른다고 하면 되겠어, 마누라는 나 몰라라 해놓고.
가뜩이나 크지 않은 목소리가 더욱 작게 웅얼거린 탓에 그 처는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하이고, 그 청년도 안됐네. 그 마음이 어땠을 거야. 에휴,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나.
뜬금없이 밥타령을 했다. 안사장이 웃었다.
오지랖은 또, 그렇게 죽일 놈 하더니 이제 와서는 밥 해먹이고 싶어.
아 사람이 그런 일까지 겪었다는데, 따뜻한 밥 한 끼 먹이고 싶은 게 당연지사 아뇨.
양가에 생난리가 나기 전에 자신이 사윗감에게 해먹이려고 딸 편에 보내준 음식을 그 청년도 함께 먹었다는 것을 한여사는 알지 못했다. 그 집밥 때문에라도 그 남자가 더 자신의 딸을 꿈꾸게 되었다는 것도 역시 알 수 없었다.
어이구 그래, 나중에 뭐 잘 해결되면 그러든지. 사돈이 작은아들이라고 하니까 사돈총각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네.
남편의 말에 한여사는 사돈총각은 무슨… 구시렁거렸으나 얼굴이 잘생기다 못해 예쁘장하기까지 했던 것만 기억나는 그 불행한 청년이 다시는 나쁜 마음을 먹지 않도록 속으로 기원했다. 그 청년이 스스로에게 위해를 가하기는커녕 생부에게 성공적으로 신장을 떼주고자 술담배마저 중단하고 졸지에 바른생활 사나이로 지내고 있는 것을 한여사는 알 도리가 없었다.
요한이 일하는 칵테일바는 명절 당일을 빼고는 정상영업을 했다.
달리 오갈 데 없는 사장과 직원의 처지로서는 차라리 그게 속이 편했다. 세월이 갈수록 서울 시내의 차량이나 유동인구는 명절이라고 해서 평범한 휴일보다 크게 줄어드는 것 같지도 않았고, 젊은이들은 마치 예사로운 주말처럼 데이트를 하거나 술집에도 들락거리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죽은 태수 처의 납골당을 함께 찾은 후에 외식으로 마무리하는 것 외에는 별달리 할 일이 없는 점주와 유일한 점원이자 동거인인 두 사람은 여느 때처럼 술을 만들고 나르며 명절 연휴를 보내왔다.
다만 고인의 쉼터를 찾고 나면 꼭 식사에 소주를 곁들였던 태수로서는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못해 꽤 고생을 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평소 먹던 육개장 등의 한식 대신 아예 주류를 판매하지 않는 패스트푸드점에서 패티가 여러 장 들어간 햄버거의 세트메뉴로 배를 채우고 뒷골이 땅길 정도로 차갑고 달디 단 아이스크림까지 걸신들린 것처럼 먹어치웠다. 형, 차라리 술담밸 다시 하는 게 낫겠어요. 요한이 염려하자 태수는 넌 왜 멀쩡한 거냐? 뭐 별로 힘들어하지도 않는 거 같구. 부럽고도 이상해서 말했다. 그러게요. 그냥, 별로 생각이 안 나요. 요한 스스로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덕분에 살이나 좀 붙으면 했는데 입맛도 그대로고, 하여간 평범하게는 못 살게 생긴 놈. 일회용 스푼을 야무지게 핥으며 태수가 탄식했다. 요한은 그저 쓸쓸히 웃을 뿐이었다.
비록 금단증세는 거의 없을지라도 하루빨리 수술대에 눕고 싶은 요한의 간절한 바람과는 반대로, 좀처럼 날짜는 확정되지 않았다. 고령의 신장수여자의 몸상태가 좋지 않은 것이 주요원인이었다. 처음에는 연휴가 끝나자마자 가능할 거라 안내받았는데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었다.
시간은 흘러가는데 목이 타도록 기다리는 생모의 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언제라도 빨리 해치워버리고 싶은 생부의 수술 일정은 잡히지 않아 요한은 화실에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일하지 않을 때는 연필이나 붓이라도 손에 쥐고 있어야 비로소 견딜 수 있어서였다. 그는 화실의 민선생처럼 조소에도 관심을 보였으나 일전의 불미스러운 일로 그녀에게 호되게 야단만 맞았다.
요한의 사고 때문에 민선생은 자신의 취미의 작은 흔적마저 화실 전체에서 모조리 치워버렸던 것이다. 다른 화실 기웃거리면 여러모로 사람 아닌 거 알죠? 그러면 바로 사장님한테 일러서 정말 누드모델 하게 될 거예요. 민선생의 경고에 요한은 한마디도 못하고 자리를 피했었다.
그렇게 일을 하고 그림을 그려도 요한의 시간은 자꾸 남아돌았다. 특히 가게가 항상 바쁜 것은 아니었으므로 더욱 그러했다. 그리고 그 시간을 메워준 것은 뜻밖에도 희영이었다.
병원에서 이복동생을 만나고 며칠 만에 희영은 아우의 일터에 남편까지 대동하여 찾아왔다. 그전에 통화를 두어 번 했고 칵테일바에 대해서도 간단히 이야기는 해주었지만, 그렇게 빨리 매형이라 불러야 할 남자까지 함께 찾아올 줄은 몰랐으므로 요한은 몹시 당황했다. 그러나 희영은 ‘아줌마 주책’을 충실히 수행할 결심을 한 모양이었다. 얼떨결에 그녀의 남편과 인사하고 태수까지 소개하게 된 요한은 누이의 속셈을 알 수 없어 그저 당혹스럽기만 했다.
신경 쓰지 말고 볼일 봐. 알아보니 핫플레이스라고 해서 데이트 겸 와본 거야. 왜, 너무 늙어 물 흐리니?
희영은 농담까지 던져보았지만, 요한의 겁먹은 듯한 얼굴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그녀의 배우자는 꽤 훈훈한 미남에 키도 훤칠한 데다 미소가 떠나지 않는 얼굴이었으나, 서양인이나 미국 교포가 숨기기 힘든 특유의 발음을 구사하는 데다 아내와는 빠른 속도의 영어로 대화하는 바람에 가뜩이나 영어울렁증이 있는 요한을 더욱 긴장시켰다.
태수도 마찬가지였다. 원래의 그라면 처음 보는 요한의 피붙이에 대한 궁금증을 못 참고 그들의 자리를 기웃거리며 한마디라도 더 말을 섞어보려고 했을 것이나,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눈치 빠른 그는 짧은 인사를 나누며 상대방이 검은머리 외국인임을 바로 파악했다. 그래서 그는 이놈의 얼룩은 지워도 지워도 끝이 없어… 괜히 중얼거리며 이미 닦은 유리잔들을 다시 힘주어 닦으며 되도록 카운터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했다.
요한과 태수의 기색을 알아챈 희영은 간단히 칵테일 한 잔만 빠르게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술값을 받지 않으려 하는 두 사람에게 그녀는 그럼 다음에 와서는 두 잔 마셔야겠네요, 물론 돈 내고. 한쪽 눈까지 찡긋하며 웃어 보이고는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하는 두 사람을 뒤로하고 남편의 팔짱을 끼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그러고는 이틀 뒤에 또 나타났다. 이번엔 혼자였다.
응, 오늘은 좀 오래 있다 갈 거라서. 이 시간에 이웃집에 또 아이 맡기기도 미안해서.
형님은… 들릴락 말락 겨우 묻는 요한에게 희영은 여전히 거침없이 웃으며 답했다.
그녀는 비어 있는 바 자리에 냉큼 앉아서는 요한이 일하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러고는 태수에게 동생에 대해 틈틈이 물어보고 집중하며 대답을 들었다. 큰고모를 통해서는 제대로 알 수 없는, 요한이 장성한 후의 삶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였다.
태수는 그 남편과는 달리 한국어 원어민이자 또래인 희영이 요한의 핏줄이며 적어도 이복동생에게 적개심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곧 원래의 수다를 늘어놓았다. 그는 희영이 하나를 물으면 열을 말했고, 그중에는 최근 몇 개월 사이에 있었던 사건사고는 물론이고 요한과 진원모의 편치 않은 관계마저 있었다.
전자에 대해 희영은 진원과 그 약혼녀가 궁금해졌으나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주름이 자글자글해서도 더한 짓을 저지르는, 사람 탈만 쓴 짐승들도 많은 세상이었다. 결혼도 하기 전의 청춘남녀들이었고, 짧은 소낙비 같은 것이었다. 제삼자인 희영에게는 크게 심각하지 않은 해프닝 정도로만 여겨졌다. 그저 건강해서, 에너지가 넘치는 젊은이들이어서 가능한 일이다… 환자인 희영으로선 오히려 부럽기까지 했다. 건강이 최고란 진부한 말을 병들기 전의 희영은 한심스러워했었다. 그것은 마치 유전자의 생식본능에 절대충성하는 노예선언과 같지 않은가.